정치, 문화, 경제 등 어떠한 분야라도 생각하지도 못했던 큰 외부충격이 없는 한 스스로 진화하여 변화하는 일은 거의 없다. 물론 간혹 혜안을 지닌 석학들이 사전 경고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소수의견으로 치부되어 무시되기 쉽다. 때로는 다수파에 의해 비난받기도 한다. 그러다 실제 위기상황이 발생하여 그 여파가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하면 어디선가 온갖 전문가들이 나타나 호들갑을 떨면서 대책 마련에 분주하게 된다. 과거 90년대 초 일본 부동산 버블의 붕괴, 2000년대 초 디지털혁명의 도래, 10여 년 전 글로벌 금융위기가 모두 그랬다. 분야마다 충격의 크기나 범위가 어떤지에 따라 해당 분야에서 발생하는 변화의 폭도 찻잔 속의 태풍처럼 가라앉기도 하고 아예 새로운 판이 만들어지는 대변혁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때마다 막연히 늑장을 부리던 기업이나 특정 직업군은 사라졌으며, 새로운 시대적 변화에 적응한 기업이나 특정 직업군이 탄생하기도 하였다. 패러다임의 변화다.

이번 코로나19사태로 최근 일본 누리꾼들은 우리나라를 부러워하기도 질시하기도 한다. 적극적인 방역대책과 검사 실시, 발달된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한 감염자 이동 경로의 확인과 공개로 확산을 차단하고,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한 마스크의 5부제 판매로 사재기를 원천적으로 차단한 사례들이 대상이다. 일본의 일부 언론에서는 한국에 살고있는 일본인이 ‘이 시기에 한국에 있어서 좋았다’라는 인터뷰를 소개하며 한국을 배워야 한다며 일본 정부의 늑장 대응을 비판한다. 또 다른 일부 언론에서는 국민의 인권을 무시하고 개인 모바일 위치정보를 공개하거나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감시체제와 수많은 CCTV가 존재하는 통제국가여서 가능한 성과라고 평가절하하기도 하였다. 외형적인 특정한 사안만으로 쉽사리 평가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여전히 종전이 아닌 전쟁 중 휴전상태에 있는 특수한 상황에 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설령 우리나라가 통제국가라 하더라도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는 데이터가 디지털화되고, 모바일 앱을 개발할 실력자들이 무수히 양성되어 있고, 높은 수준의 인터넷보급망과 모바일보급률이 갖추어져 있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전자정부가 일정 수준에 달하여 있지 않았다면 시도조차 불가능하였던 일이다. 바로 그러한 성과야말로 우리나라가 갖춘 사회적, 정보통신 기반과 국민의 단합된 행동력 덕분이다. 어떠한 큰 충격이 왔을 때 이것을 극복하거나 타파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고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위기 극복이나 대책의 효과도 달라진다. 같은 충격을 받고 대응수단을 알고 있더라도 그 기반이 적기에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최근 정부는 비대면 서비스산업을 육성하기로 하였다. 물론 전혀 새로운 산업은 아니다. 이미 우리는 비대면 서비스 시대에 살고 있고, 활용하고 있다. 모바일뱅킹으로 자녀들에게 용돈을 입금하는 행위도 비대면 서비스다. 이번 전염병으로 인해 외출 자제와 재택근무가 늘어나 CATV로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홈쇼핑으로 물건을 주문한 것도 모두 비대면 서비스다. 하지만 정부가 육성하려는 비대면 서비스는 이미 활성화되어있는 이러한 분야보다는 전형적인 오프라인 분야를 온라인으로 전환하거나 추가함으로써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방향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대면 서비스의 취약점을 보완하는 일종의 우회경로를 만드는 기반의 구축일 수도 있고, 소비자에게 선택의 폭을 넓히는 효과를 주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비대면 서비스 분야는 물론 소비자에게만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기업이 대상일 것이다. 다만, 해당 분야의 기업에 기반이 구축되어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새로운 비대면 서비스에 적응하는 기간과 효과는 달라질 것이다. 기업의 내부 경영에도 이와 같은 변화의 흐름은 적용될 것이다. 직원들을 물리적인 특정 장소에 모아두고 특정사안을 전달하던 경영자는 자사의 인트라넷을 통해 전국에 산재한 직원들에게 동영상으로 지시사항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바꿀 수도 있다. 이미 대기업이라면 시행하고 있을 수도 있다. 문제는 내부가 아닌 외부다.

다양한 제품을 생산하여 판매해야 하는 제조업체들은 이번 코로나19사태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미 인터넷쇼핑몰을 직접 운영하고 있던 대기업이면 몰라도 중소제조업체와 소상공인들 대부분은 위기에 빠졌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모두 자체 유통망이 없기 때문이다. 골목상권이라고 하는 소상공인들은 말 그대로 골목이라는 공간 지리적인 제약에 묶여있다. 그 골목으로 찾아오는 유동인구의 움직임에 따라 매출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번처럼 아예 사람들의 출입과 이동이 제한되는 환경이 만들어지면 그야말로 무인도에 고립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하기에 비대면 서비스가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에게는 위기 탈출의 동아줄이 될 수도 있다.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들이 대기업보다 부족한 부분이라면 특히 인력 부족, 자사 제품을 알릴 판촉, 광고수단의 제약일 것이다. 정부가 이들의 비대면 서비스를 육성시킨다고 해도 문제다. 중소제조업체들 대부분은 사장과 직원들이 함께 만든 제품을 유통대행업체에 납품하기도 벅찬 실정이다. 공장 한구석에 비대면 서비스 육성 지원자금을 빌려 새로운 컴퓨터 서버를 들이고 관리직원을 채용하여 직판한다고 해서 들인 비용만큼 수익이 확보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소상공인도 마찬가지다. 사실 진정한 강소기업, 성공한 소상공인은 이러한 수단과는 큰 상관이 없다. 대량생산체제가 아닌 한 대기업과의 가격경쟁력에서 이길 수 없다. 자사만의 기술력과 품질을 갖춘 제품군이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제품경쟁력을 갖춘 중소기업, 소상공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인력한계, 광고비용 제약으로 유통대행점에 거의 원가로 납품하기 급급하였던 중소기업, 소상공인들에게 비대면 서비스 분야의 진출은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도 있다. 지금 세상에는 저비용으로 활용 가능한 수많은 소셜네트워크가 넘쳐나기 때문에 비교적 저비용으로 비대면 서비스를 활성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대면 서비스에서 정작 유의해야 할 부분은 따로 있다. 디자인이다. 현대 소비자들은 시간이 걸리는 것을 싫어한다. 물건을 고를 때도 친절하고 상세한 설명이 채워진 제품설명서는 아예 뜯지도 않는다. 제품디자인이 예쁘거나, 해당 제품의 장점을 직관적으로 시각화된 한두 줄의 설명만으로 충분하다. 인터넷의 수많은 정보 속에서도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링크나 동영상 속에 담긴 내용을 짐작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사진의 축소판인 엄지손톱(Thumbnail)이 선택의 핵심이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이 아무리 좋은 제품을 생산하고 친절하고 상세하게 알려주는 동영상을 제작하여 배포하더라도 소비자가 선택하지 않으면 그뿐이다. 한눈에 알 수 있는 직관적인 화면 한 장, 한 줄의 제품 설명은 전혀 차원이 다른 분야다. 아주 특별한 예외를 빼면 사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제품 사이에 기술력과 기능의 차이는 생각만큼 크지 않다. 중소기업보다 대기업 제품가격이 비싼 이유는 제품의 성능보다는 대기업 이름 즉 브랜드의 힘과 편리한 A/S 정도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이 대기업의 브랜드 힘에 대항할 유일한 수단은 디자인의 힘뿐이다. 앞으로 비대면 서비스산업이 전 분야에서 성장해 나가려면 국가나 지역은 물론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 모두 디자인에 힘을 쏟아야 한다. 이제 디자이너가 활약할 때가 왔다.

/한국은행 포항본부 부국장 김진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