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효정<br>한동대 4년·ICT창업학부
한효정
한동대 4년·ICT창업학부

미국의 작은 교차로에는 어디든 붉은색 STOP 표지판이 있다. 잠시 차를 멈추고 1, 2, 3을 세고 오가는 차가 없으면 출발해도 무방하다는 안내판이다. 빨리빨리 문화가 익숙한 한국인들은 간혹 이 표지판 앞에서 경찰에게 딱지를 많이 끊긴다고 한다. 주변에 접근하는 차가 없으니 잠깐 속도를 줄였다가 서행하면 괜찮겠지, 방심했다가 잠복하고 있던 경찰에 적발당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STOP 표지판을 만났다. 일상을 멈추고 우리는 하나둘 셋 숫자를 센다. 자기 몸에 별문제가 없어 보여도 서로를 위해 브레이크를 밟아야만 한다. 생각해 보면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돌아보지 못했던 여러 일에 머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미국 전역에 자택 대기령이 떨어진 이후 처음에는 밀린 잠도 늘어지게 자고 맘껏 넷플릭스도 보며 지냈다. 허리가 아파 더 이상 침대에 누워있지 못하겠고 화면을 멍하니 노려보는 일도 귀찮아진다. 분리 수거하듯 미뤄 놓은 일들을 시작했다. 포항을 떠나 미국에서 인턴을 시작하면서 배운 작은 차이들을 하나, 둘, 셋 쉬어 가는 마음으로 나누고 싶다.

하나, 가족 단위 활동이 많은 미국에 있으니,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적은 한국 생활을 돌아보게 된다. 여기는 가족과의 시간을 우선시하는 문화가 당연하다. 받아들이기 조금 낯설기도 했다. 이런 우리 민족에게 가족 얼굴 볼 기회가 찾아왔다. 옛말에 가화만사성이라 했다. 그동안 얼굴 보지 못해, 낯 뜨거워하지 못했던 사랑한다는 표현들을 서로 건네는 시간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둘, STOP 표지판에 잠시 멈췄다가 셋까지 센 다음에는 다시 액셀을 밟아야 한다. 이때 우회전을 할지 직진을 할지 결정할 수 있다. 우리는 잠시 멈춰있으니 길을 잘못 들었어도 좌나 우로 방향을 바꾸는 일이 가능하다. 코로나로 얻은 잠깐의 여백은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을 향해 제대로 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황금의 기회다. 치열하게 싸우고 죽음을 앞둔 고지전 마지막 순간에 왜 이렇게 열심히 싸웠는가 전쟁의 이유를 까먹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왜(why?)라는 질문을 꺼내 들어야 한다.

셋, 이렇게 텅 빈 것 같은 시간을 내 인생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궁금하다. 작년에 쉬려는 마음으로 휴학을 감행했지만, 정작 포항을 떠나 수도권에서 새로운 도전에 임하는 나를 보며 인생에 쉼이란 불가능한 일인가보다 회의에 빠진 적이 있다. 그래서 남보다 더 잘해보려고 경쟁하던 내 본연의 모습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그냥 쉬어 보았다. 푹 자고 일어났고, 귀찮으니 대충 전자레인지에 돌려먹던 밥을 건강해 보이는 재료로 해 먹어도 보고, 치우지 않았던 책상 위도 한 번 쓱 훑어내고, 이렇게 방에만 있다가는 죽겠네 싶어 집 앞 산책도 나왔다. 일상에서 터부시하던 모습을 하나씩 지워가니 문득 어느 순간 “나 지금 진짜 쉬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쉼이란 특별한 게 아니었다. 숨겨진 보물찾기처럼 일상의 작은 일들을 꼭꼭 씹으며 살아갈 때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하나가 전 세계를 벌벌 떨게 한다. 돈과 성공을 정신없이 좇던 교만한 인간들에게 채찍처럼 나타난 아주 작은 바이러스. 조용히 다가와 매운맛을 보여준다. 경제를 힘들게 해 부모님 사업과 내 취업을 어렵게 하는 그 바이러스가 밉기도 하지만, 이 사태가 가져온 감사한 면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가정을 회복하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하고, 자의로 쉬지 못하는 누군가에게는 쉼을 선물하기도 하고, 여러 온라인 강의나 원격지원 업무를 통해 기술의 진보를 깨닫기도 한다.

20대인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살아가는 남은 날 동안 이런 전염병이 과연 한 번뿐일 해프닝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벌써 그 횡포는 시작했고 세상은 바뀔 것이다. 뉴노멀(New Normal)이 찾아올 것이고 더 이상 당연한 것이 당연해지지 않을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격변하는 구름 아래가 아닌, 구름 위로 올라가 잔잔한 나만의 시간을, 방법을, 고민하고 찾을 수 있다. 잠시 후 다시 구름 아래로 내려와 뚝심 있게 남은 날들을 우리는 살아 낼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