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래<br /><br />시조시인<br /><br />
김병래

시조시인
 

어느 시인은 구절초와 쑥부쟁이도 구별하지 못하고 시인행세를 한 것이 부끄럽다고 했지만, 종자식물과 포자식물을 구별하지 못하는 시인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가끔씩 시(詩)에다 ‘민들레 홀씨’란 말을 써먹는 게 그 예다. 이끼나 버섯, 곰팡이처럼 무성생식을 하는 식물의 포자(胞子)를 홀씨라고 한다는 건 중학교 생물시간에 배우는 상식이다. 그것을 종자식물인 민들레에 갖다 붙이는 건 코끼리를 곤충이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어림없는 소리다. 남달리 사물에 관심과 애정을 가진다는 시인들조차 이 정도니 틈만 나면 휴대폰이나 들여다보는 아이들이야 오죽할까.

이제는 어른들 중에도 억새와 갈대를 구별하지 못할 뿐 아니라 밭에서 자라는 밀과 보리, 콩과 팥이 어떻게 다른지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좁쌀과 기장쌀을 구별 못하는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을 테고. 그러니 한 술의 밥이 입에 들어오기까지 땅을 갈아 씨를 뿌리고, 거름 주고, 김매고, 추수하고, 타작하고, 말리고, 찧어서 익히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걸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들녘에는 음식이 되는 농작물만 있는 게 아니라 잡초라 불리는 온갖 풀들이 있다. 김매는 아낙들에겐 지겨운 일거리기도 하지만, 사람이 밥만 먹고 사는 게 아니듯이 지천인 들풀인들 어찌 소용이 없겠는가. 풀 한 포기 없이 삭막한 사막에 비한다면 잡초 우거진 이 땅은 얼마나 우리의 정서를 생기롭고 풍성하게 하는 낙원인가. 먹고 사는 게 어려울 때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채소나 곡식이 전부였지만, 이제는 잡초에도 눈을 돌릴 때가 되었다. 곡식이건 잡초건 다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는 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즘은 참 편리하게도 스마트폰을 갖다 대기만 하면 풀꽃의 이름과 정보를 알려준다고 하니 관심이 있으면 손쉽게 풀꽃들과 친해질 수가 있겠다. 우선은 주변에서 자주 보게 되는 것부터 알아보는 게 순서일 것이다. 특별하거나 희귀한 것보다는 가장 가까이에 가장 흔하게 있는 것들이 우리 정서의 바탕이 되는 가장 소중한 것들이라는 생각이다. 풀꽃으로는 이른 봄의 봄까치꽃, 냉이꽃에서부터 민들레, 제비꽃, 양지꽃, 여름의 개망초와 엉겅퀴, 클로버, 애기똥풀, 달맞이꽃, 가을의 여뀌와 물옥잠, 고들빼기, 씀바귀, 쑥부쟁이 등이 가장 흔하게 보이는 꽃이다. 그 밖에도 꽃이 보잘 것 없는 뚝새풀, 겨이삭, 메귀리, 포아풀, 수크렁, 강아지풀 같은 벼과식물이나 방동사니, 하늘지기, 괭이사초 같은 사초과 풀들은 종류도 많고 구별도 어려워서 풀이름 공부의 중급과정은 될 것이다.

그까짓 풀이름 따위 알아서 무슨 소용이냐고 할 사람이 많겠지만 김춘수 시인도 말하지 않던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들녘에 피고 지는 수많은 풀꽃들 그 하나하나에 눈 맞추고 이름을 불러 주는 일이 어찌 쓸데없는 짓이겠는가. 그들이 전해주는 거짓도 왜곡도 의혹도 없는 생명의 메시지가 한갓 부질없는 게 아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