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기자가 만난 경북사람
고교 퇴학생에서 대학교수가 된 시인 이승하

경북에서 유년을 보낸 중앙대 이승하 교수가 천진한 표정으로 서재에 서 있다.

해사한 얼굴, 선량한 눈매, 소년의 웃음을 지닌 중앙대 이승하 교수. 얼핏 봐선 예순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는다. 그늘이나 곡절 하나 없이 순탄하게 살아온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는 않다.

상처 받기 쉬운 예민한 영혼을 가진 이승하의 소년기는 ‘거의’ 지옥에 가까웠다. 1970년대 군사독재 시절 학교들은 군대 이상으로 폭력적이었고, 서울법대를 나와 판검사가 아닌 문인이 되겠다고 선언한 형님으로 인해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학교와 가정 어디서도 편히 숨쉬기가 힘들었다. 이처럼 어두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고교생 이승하는 신경 쇠약을 앓으며 가출과 자살 시도를 거듭했다. 그 결과는 퇴학 처분.

하지만, 그에게는 ‘성실함’과 ‘예술을 향한 열정’이 있었다. 그것들이 파탄 직전에 이른 이승하의 청년기를 구해냈다. 회사원, 출판사 직원, 교수 등 어떤 직업을 가졌을 때건 성실한 삶의 태도를 버린 적이 없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20~30대를 보내고, 연구와 강의에 바친 40~50대를 지나 이제 수구초심(首丘初心)을 떠올린다는 이승하 교수. 애잔한 눈빛으로 고향 쪽을 바라보는 그를 만나 살아온 내력을 이야기 들었다.
 

도서관서 책만 끼고 살아온 조용하고 내성적인 소년
법대출신 형의 문인선언에 발칵 뒤집힌 집안 영향에
고교시절 가출과 자살시도 거듭하며 암흑기 보내
성실함과 예술 향한 열정이 파탄 직전 청년기서 구출
10여 년간 대기업서 일하다 마흔에 중앙대 교수로
현실참여시 쓰며 시대의 아픔 보듬는 창작활동 해 와
최근엔 고향 김천 일대 소재로 한 연작시 신문에 기고
“성실한 시인이자 따뜻한 스승으로 기억되길 바라”

-‘코로나19’로 한국 학교들이 전례 없던 상황을 맞았다. 대면 수업이 아닌 동영상 강의, 온라인 개강 등으로 어수선하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주 우울하다. 교수란 직업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데 학생들 얼굴도 못 보고 동영상 강의 녹화를 하고, 과제를 이메일로 받으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인적 없는 교정에 봄꽃이 활짝 피어 있어 눈물이 다 났다.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김천에서 성장한 것으로 안다. 그 시절 잊을 수 없는 기억은.

△경찰관이었던 아버지가 3년에 한 번 꼴로 전근을 다니셨기에 출생지와 성장지가 다르다. 김천에서 생활한 건 고등학교 입학한 이후 2개월 정도다. 그 이후로도 간간이, 혹은 한동안 부모님이 계신 김천에 있기도 했지만 주로 세상을 떠돌았다. 장문의 유서를 써놓고 집을 나가 기차를 타고 상경했다. 서울 구경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무작정 상경은 아니었고 나중에 출세해 어머니를 모시러 오겠다고 했다.

-김천고등학교를 다녔다. 현대문학 분야에서 다수의 작가를 배출한 학교인데.

△두 달밖에 안 다녔기에 교풍을 느낄 시간은 거의 없었다. 내가 입학한 그해 대도시 고교는 평준화되었고 소도시는 시험 제도가 유지됐다. 그런 이유로 인근 도시에서 수재들이 몰려왔다. 교사들도 엄격했다. 첫 번째 월말고사부터 틀린 문제 숫자만큼 매를 맞은 기억이 난다. 경찰직을 그만둔 아버지는 사법고시 1차시험에 합격한 형이 2차시험을 보지 않고 문학을 하겠다고 하자 분기탱천 했었다. 집에서 맞고 학교에서 맞고…, 견딜 수 없어 서울로 줄행랑을 놓아 고교시절이 끝나버렸다. 그래서 김천 출신의 문태준, 김연수, 김종태, 김중혁 같은 문인들을 학교 후배라고 하기엔 좀 어색하다. 문단 행사 등에서 만나도 선배티를 안 내고 존댓말을 쓴다.

-경북에서의 소년시절은 어땠나. 외향적인 아이였는지,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는지.

△후자다. 초등학교 5~6학년과 중학교 3년 동안 김천문화원 도서관의 책을 마음껏 빌려보면서 보냈다. 학교 성적은 부모님을 낙담케 했지만, 학원사 세계명작이니 계림문고니 하는 청소년용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면서 보냈다. 책만 끼고 살았으니 나름대로 행복했다.

-대기업 사원으로도 일했다. 교수 외의 직업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 남아 있는가.

△1987년부터 1997년까지 11년 동안 샐러리맨이었다. 쌍용양회에서 7년을 근무했고, 문예출판사와 금강기획에서도 1년씩 근무했다. 회사생활 하면서 박사과정 입학시험 공부도 했었고 졸업까지 했다. 상사의 배려 덕분에 일주일에 하루 결근을 해도 결근 처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못한 일을 업무 외 시간에 하느라 고충이 많았다.

1998년 인천 재능대학 문예창작과 겸임교수로 있었고, 막 마흔이 된 1999년에 모교인 중앙대에 부임했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겠지만 20대와 30대가 힘들었다. 작년에 학교에서 20년 근속상을 받았다. 세월이 너무 빠르다.

-당신의 초창기 시들은 슬픔, 세상과 인간에 대한 회의, 시집 속에 사진이 들어간 형식적 파격 등으로 기억되는데.

△내가 태어난 다음날 4·19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에 이상하게도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때 아버지가 서울에서 근무했다면 분명 학생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을 것이다. 무장공비 사건과 간첩단 일망타진 기사를 수시로 보던 시절이었다. 중동에선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남미에선 걸핏하면 쿠데타가 발생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침 시 등단작이 ‘고문 정국’과 ‘보트피플’을 다룬 것이어서 그 뒤로 국내외 곳곳에서 일어나는 정치적 상황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시를 쓰게 됐다. 비극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자 사진을 시에 끌어들이게 됐다. 세상은 폭력과 광기가 난무하는 소돔이었고 무간지옥이었다. 순수서정시보다는 현실참여시가 내가 갈 길이라 생각하고는 뭉크의 그림 ‘절규’ 속 인물의 심정으로 시를 쓰던 시기였다.

-올해 이순을 맞았다. 젊은 시절 시와 지금의 시가 달라졌는가.

△시집 제목을 몇 개 들어보겠다. ‘폭력과 광기의 나날’,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엄살이 아니라 이런 시집을 누가 사볼 것인가? 다만 교과서에 3편이 실려 교사들과 학원 강사들이 내 시를 해설하고 문제로 내기도 한다. 며칠 전에 시집 ‘예수·폭력’을 냈는데 이제는 방향을 틀어 유쾌한 시, 밝은 내용의 시, 유머러스한 시를 쓰고 싶다. 잘 될지는 모르겠다.

-시와 함께 소설과 평론도 쓰고 있다. 각각의 작업이 어떻게 다른지.

△시를 쓸 때는 즐겁고, 신문 칼럼을 쓸 때는 펜이 춤을 춘다. 논문, 평론, 계간평, 심사평 등은 억지로 쓰는 탓에 등에 땀이 맺힌다. 소설은 품이 많이 들어 띄엄띄엄 발표한다. 그래도 최근 중편 하나와 단편 둘을 발표했다. 친일파 문제를 다룬 소설을 어떤 중견작가가 내리 3번을 읽었다고 해서 힘과 용기를 얻었다.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삶의 자세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라고 말해준다. 부처와 예수와 마호메트가 종교의 창시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인간을 연민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종교의 차이로 분쟁이 일어나니 너무 안타깝다.

-당신의 기억 속 스승은. 그리고 아끼는 제자는.

△권태을 선생님은 중학교 시절 3년 동안 글쓰기를 지도해주셨다. 고등학교를 퇴학당하고 방황할 땐 용기를 줬다. 대학 때 스승 신상웅 교수님은 소설가의 길로 이끌어준 분이다. 대학원 스승 김주연 교수님은 줄기차게 쓰는 사람만이 작가임을 가르쳤다. 제자가 등단을 했다고 알려오거나, 취직을 했다는 전화가 오면 종일 기분이 좋아 웃고 다닌다.

-한 매체에 ‘내 영혼을 움직인 시’를 오래 연재했다. 어떤 시가 영혼을 움직이나.

△현대시는 난해하고, 너무 길고, 산문 형식이라 시를 읽지 않게 됐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쉽게 이해되지만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시가 분명히 있으리라 생각해 365일 동안 1편씩 설명하는 작업을 꼬박 1년간 했다. 해설을 쓰는 것보다 시를 고르는 게 훨씬 어려웠다. 시의 힘이 거기 있지 않을까? 영혼을 움직이게 하는.

-시인은 어떤 사람인가.

△언어가 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기쁘다고 환호성을 지를 수는 있다. 소리를 내는 자, 절규하는 자가 바로 시인이 아닐까.

-출간을 포함한 향후 계획은.

△공초 오상순 평전과 청소년용 시인 윤동주 전기, 시조만을 다룬 문학평론집을 4월 말에 함께 출간한다. 예전에 낸 시집 ‘뼈아픈 별을 찾아서’도 재출간된다. 신들린 듯 쓰다 보니 책을 마구 내고 있다. 반성할 일이다.

-삶을 돌아볼 나이다. 어떤 스승, 어떤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천재 시인이 아니라 성실한 시인으로, 엄한 스승이 아닌 따뜻한 스승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철없던 10대 땐 서울로 부산으로 대구로 뛰쳐나가곤 했었다. 나이가 드니 고향 생각이 많이 난다. 얼마 전엔 ‘김천신문’에 김천 일대를 소재로 한 연작시를 20여 편 연재했다. 수구초심이라는 말의 뜻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라고 말해준다. 부처와 예수와 마호메트가 종교의 창시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인간을 연민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종교의 차이로 분쟁이 일어나니 너무 안타깝다.

언어가 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기쁘다고 환호성을 지를 수는 있다. 소리를 내는 자, 절규하는 자가 바로 시인이 아닐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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