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마흔을 넘겨 깨달은 꿈을 위해

라트비아 국립 미술관 외부 전경.
라트비아 국립 미술관 외부 전경.

◇ 라트비아 국립 미술관에 가다

엊그제 집을 나온 듯한데 벌써 한 달을 채웠다. 이렇게 오래 돌아다니는 여행은 젊은 시절, 20대에 했었어야. 마음은 있었으나 도저히 그럴 수가 없던 날들이었다. 이렇게 훌쩍 나이를 먹고서도 멀리 떠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 생각한다. 사실 이번 여행이 나의 사십대에 가장 중요한 버킷리스트였다. 지난해 출발하려는 계획이 무위로 돌아가고 바등거리며 다시 떠날 계획을 세운 건 그만큼 ‘유라시아 횡단’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지금껏 해보고 싶은 일들 중에 가장 가슴 뛰는 일이었다. 살면서 이것만은 해보고 싶은... 그런게 있지 않나.

마흔부터 매년 세 가지씩 버킷리스트를 썼다. 지난해엔 딱 한 가지 ‘유라시아 횡단’만 생각했었다. 그게 한해 미뤄졌고 약간의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여기까지 왔다. 떠나온 걸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 바람을 가르며 달릴 때 느끼는 자유로움은 누구와도 공유하기 어렵다.

인생은 한 번 뿐이고, 짧고, 뒤돌아보곤 후회할 일을 만들며 산다. 마흔 언저리쯤 겪었던 몇몇 슬프고 강렬했던 경험들이 이 생각을 더 굳게 만들었다. 그리고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에너지 쓸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도 마흔이 넘어서야 깨달았다.(무엇을 하건 회복하는 속도가 예전 같지 않다.) 건강할 때 몸을 써서 하고 싶은 일은 해야지, 마음먹은 이유다.

 

라트비아 국립 미술관 로비. 수준 높은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건물이었다.
라트비아 국립 미술관 로비. 수준 높은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건물이었다.

오늘은 라트비아 국립 미술관에 다녀왔다. 19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라트비아의 주요 작가와 작품을 훑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유럽의 변방이었고, 러시아와 소련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작품성이 뛰어나더라도 널리 알릴 기회를 잃어버린 작가들이 많았을 것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테두리 안에서 창작력을 억눌러야 했던 소련 시절, 1950-60년대 그려진 작품들이 가장 눈에 들어왔다. 크기도 대작이거니와 몸을 쓰는 사람들의 생동감과 건강함이 작품 속에 넘쳤다.

비구상, 추상은 작품을 보자마자 ‘좋다!’라는 느낌이 들지 않으면 어렵기 때문에 안목이 높지 않은 나로선 작가가 당시 처했던 현실은 접고라도 당장 눈에 들어오는 작품 앞에 오래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드는 작가의 작품은 사진을 찍고(허락을 받았다) 작가의 이름도 따로 기록해두었다. 지하 전시장엔 젊은 예술가들의 영상, 설치작품들을 전시 중이었다. 그중 1971년 시베리아로 떠났던 시인 미에르발디스가 촬영한 영상과 자신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와 편지 속에 넣어 보냈던 말린 야생화가 인상 깊었다. 38년이 지난 후 이 편지를 발견하고 영상을 다시 편집해 올린 이는 편지를 받은 친구의 아들(카리스탑스 에피너스, 정확한 발음인지 모르겠다.) 이 전시의 제목은 ‘Forget me not’. 그의 바람대로 그는 잊히지 않았다. 38년 동안 친구의 편지와 꽃을 간직하고 세월을 뛰어넘는 작품으로 만든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잠시 시인의 편지 앞에서 생각했다. 그의 편지를 해석할 수 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남았다.

 

폴란드 바르샤바 숙소 근처 골목. 가로수가 울창한 한적한 주택지였다.
폴란드 바르샤바 숙소 근처 골목. 가로수가 울창한 한적한 주택지였다.

라트비아 국립 미술관은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돔 천장부터 지하수장고까지 모두 개방되어 있어서(수장고 출입은 불가능) 작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레드카펫을 유유히 밟고 내려오며 돔과 날개처럼 로비를 감싼 계단만으로도 개방감이 훌륭하다 감탄했다. 미술관으로 딱 적당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여기저기 발길 가는 대로 돌아다녔다.

내일 떠난다고 생각하니 섭섭하기도 하고 볼만한 곳들을 더 찾아볼 걸 후회도 된다. 내일은 목적지를 생각지 않고 남쪽으로 출발.
 

수많은 순례객과 관광객들이 자신이 가져온 십자가를 이곳에 놓고 간다.
수많은 순례객과 관광객들이 자신이 가져온 십자가를 이곳에 놓고 간다.

◇ 리투아니아 독립의 상징, 십자가 언덕

드디어 리가를 떠나기로 했다. 결국 리가에서 해결한 건 아무것도 없다. 러시아를 벗어나 잠시 휴식한 셈. 고장난 곳을 임시 조치하고 오늘 350킬로미터쯤 탔는데 문제가 없는 듯하다. BMW 본사가 있는 뮌헨에 가서 부품을 구하기로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로시를 받을 때, 러시아에서 라트비아로 넘어올 때의 번거로움을 생각하면 유럽연합은 교통만 놓고 보자면 가상의 국경선만 존재할 뿐이다.

이리 왔다갔다 할 수 있는 편리함에 익숙해지면 쉽게 과거로 되돌리기는 힘들 듯하다. 영국의 ‘브렉시트’는 섬나라이기 때문에 피울 수 있는 고집이 아닐까. 도로를 이용해 이동할 수 있는 편리함을 맛보았다면 단언컨대 브렉시트는 나오지 않았으리라. 우리도 북한과 도로든 기차든 이어져 대륙으로 물류를 이동할 수만 있다면 더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을 수도. 한번 길을 내기가 어렵지 길이 열리고 나면 쉽게 닫히지는 않을 것이다.

 

시아울리아리 십자가 언덕.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상징하는 곳이다.
시아울리아리 십자가 언덕.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상징하는 곳이다.

아침 떠나올 때 같은 방을 썼던 메르키비 아저씨가 가는 길에 시아울리아리 가까이 있는 ‘십자가 언덕’을 들렀다 카우나스로 가라고 일러주었다. 십자가 언덕은 라트비아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와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상징하는 곳이다. 원래는 가톨릭 신자들의 순례지였으나 나중에는 독립투사들의 영혼을 기리고 평화를 기원하는 공간이 되었다.

지금은 누구나 십자가를 놓고 기도하는 이름난 순례지이자 관광지 같다. ‘십자가 언덕’에 놓인 십자가만 10만 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충분히 납득이 간다. 신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을 단체로 찾은 다른 라이더들과 같이 잠시 안전하게 여행을 마칠 수 있게 해 달라 기도했다. (다른 라이더들은 다들 십자가를 들고 왔다!) 카우나스에 도착해선 숙소에서 라면 끓여 먹고 커피도 타 마시고 꼼짝 않고 쉬는 중. 메르키비 아저씨가 이곳 구도심도 멋지다고 했는데 내일 아침 일찍 바르샤바로 출발할 예정이라 오늘은 일찍 취침하기로.

 

라트비아 국립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강조된 작품들이 많았다.
라트비아 국립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들.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강조된 작품들이 많았다.

◇ 새로운 문제, 냉각팬 고장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이대로 달릴 수는 없는 상황. 바르샤바로 들어올 때 혹시 로시가 멈추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라디에이터 열을 식혀주는 냉각팬이 고장난 듯하다. 정지하고 있으면 온도가 치솟고 계속 경고등이 뜬다. 오늘 기온은 32도, 도로 위 온도는 38도까지 올랐다.(고속도로 전광판에서 확인했다.) 이 상태에서 냉각팬이 돌지 않고 도심 도로에서 정체 상태로 있으면 엔진 열이 오를 것은 뻔하다. 또 그 열이 또 고스란히 종아리와 허벅지를 타고 올라온다. 겨우 숙소를 찾아 들어와서 내일 로시를 끌고 어디로 점검을 받으러 가야하나 고민하는 중에 친한 선배에게 연락이 왔다. 바르샤바에 있는 자신의 친구 에바 씨에게 연락해보라는 전갈을 받았다. 이렇게 절묘한 타이밍이란. 한국말이 나보다 더 유창한 에바 씨에게 소개받은 미캐닉을 찾아가기로. 문제가 생기고 또 해결하며 어떻게든 반환점을 향해 가는 중이다.

 

라트비아 국립 미술관 지하 수장고. 관람객이 보관된 작품을 볼 수 있도록 설계했다.
라트비아 국립 미술관 지하 수장고. 관람객이 보관된 작품을 볼 수 있도록 설계했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어놓고 나면 항상 근처 식료품점부터 찾는다. 식사는 가능하면 숙소 부엌에서 해결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거의 매일 장볼 때 콜라를 사서 마신다. 물을 마셔선 해결되지 않는 갈증이랄까. 콜라를 마셔야 그나마 해갈(?)이 된다. 숙소 벤치나 그늘에 앉아 콜라 한잔 마시면서 멍하니 있는 게 낙이다. 그런데 오늘 마신 라임 코카콜라는 오리지널보다 못한 듯하다. 지구가 뜨거워질수록 주가가 오를 기업은 코카콜라일 거다. 지금이라도 여윳돈이 있으면 투자할까보다. 지구온난화로 인류가 멸망하고 새로운 문명종이 나타나 인류의 유적을 발굴하면 가장 흔하게 발견될 것은 코카콜라를 담았던 용기들이 아닐까.    /조경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