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안동민속촌과 ‘구름에’ 고택들

‘구름에’ 리조트에 옮겨온 7채 고택들.

#. 벚꽃 속에 파묻힌 안동민속촌과 열녀 서씨

봄을 더욱 봄답게 하는 벚꽃들은 잎에게 물려준 경주와 달리 안동에는 벚꽃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대단한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의 생가 임천각과 군자정, 7층 전탑을 가로막아 철길을 낸 일제의 만행은 흉물이지만, 강 건너 민속촌 주위는 울긋불긋 꽃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80~90년대 수학여행이나 산업시찰, 답사 때 필수코스가 춘천의 소양강댐과 안동댐이었다. 안동댐을 의미 없이 보고 민속촌으로 갔다.

안동댐 수몰지에서 옮겨온 고택들 대부분이 기와집들이지만, 안동민속촌에는 초가집들이 몇 채 옮겨놓아 깊은 향수를 느끼게 한다. 안동댐 주위의 대부분 지형이 그러하듯이 가파르게 경사진 좁은 골짜기 층층이 한 채씩 놓여있다. 기능 잃은 물레방아가 맑은 물을 쉼 없이 머금고 하얀 물줄기로 토해내고 있었다. 처음 만나는 이원모 기와집은 멋 부리지 않은 담백한 맛이 흐르는 질박한 집이었다. 대문 붙은 사랑채와 안채가 한 몸 같이 ‘ㅁ’형으로 둘러진 집은 사랑채와 차이를 둔다고 했겠지만, 안채가 너무 높아 없어도 자존심 강한 안동다운 형식 같았다.

연이어 영천 신령(영천의 옛 지명)에서 옮겨온 돌담집의 돌담은 한없이 정겨워 눈물이 날 것 같다. 댕기머리에 대바구니 들고 봄나물 캐러가는 수줍은 봄 처녀의 하얀 웃음소리가 돌담에 아련하다. 돌담 앞에 소나무가 멋없이 쑥 솟아있어 돌담 집을 방해하는데 가지를 자르든지 소나무를 없애면 정겨운 돌담집이 살아나겠다.

 

통나무집(귀틀집)에 억새지붕을 이고 있다.
통나무집(귀틀집)에 억새지붕을 이고 있다.

그 옆에 돌담에 속삭이듯 피어있는 앵두꽃은 왜 이리 가슴을 울릴까. 박명실 초가집도 안동댐 수몰로 옮겨왔는데 추운 겨울을 위해 남부지방의 개방된 집이 아니라 폐쇄적으로 실용의 공간배치를 했다. 조그마한 디딜방아를 보니 삶의 애환이 물씬 풍긴다.

그 위의 이춘백 초가집도 다른 초가집들과 마찬가지로 기둥은 크고 튼튼한 것으로 바꾸어놓아 옛 정겨운 초가집 분위기는 아니지만, 서까래는 연기에 검게 그을린 옛 그대로 복원해 놓아 다행히 옛 향수가 난다. 다음 박분섭의 까치구멍 집은 안동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특이한 가옥 구조다. 안방, 건넌방, 부엌, 외양간 등등의 생활공간이 한 건물 안에 모여 있어 외양간 가축의 악취와 부엌 취사 연기를 밖으로 배출하는 연통구조이다.

이 민속촌이 지금은 텅텅 비어 야외 박물관이 되었지만, 필자도 답사 단체를 데리고 와 몇 번이나 먹었듯이, 여기 초가집을 술과 안주, 밥을 파는 주막 겸 식당으로 활용했던 곳이다.

제일위 가파른 산 언덕 위에는 영양의 석보에서 옮겨온 통나무집(귀틀집)에는 마침 갈대로 지붕을 이고 있었다. 예전에는 동네사람들이 품앗이 하듯이 했다면 지금은 일당 받는 인부들이 한다. 내려다본 초가지붕들은 아련한 그리움이 샘솟는 정겨운 풍경이었다.

여기 민속촌에는 2기의 비가 있는데 고려시대 권백종(단종의 외증조부)의 효를 기리는 비가 있고 다른 하나는 공자의 이름 틀에 희생된 기구한 여인 이천서씨 열녀비가 봄바람에 떨어지는 꽃비를 맞으며 길손을 맞이하고 있었다. 시집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김창경)과 사별하고, 몸이 불편한 시부모도 외아들 잃은 슬픔에 병을 얻자 며느리 서씨는 지극정성으로 간병했으나 세상을 떠났다. 즉시 시부모를 따라 죽으려다 장례를 치루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가련한 여인의 열녀비다. 나이(1795~1817) 겨우 22살로 4계절 중 봄만큼 고통을 안고 살다갔다. 전국에 수많은 열녀 중에는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죽어도 시가에서 죽어라’는 당시의 윤리에 친정에도 갈 수 없었다. 결국 오갈 때 없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여 죽음을 택한 형식은 열녀지만, 내용은 무언의 강요에 희생된 슬픈 열녀가 많다. 수줍은 앵두꽃도 화사한 벚꽃도 사람 없는 화려한 적막 속에 서 있다. 바람에 떨어지는 꽃잎도 시대의 윤리에 희생된 수많은 꽃다운 열녀들의 혼령과도 같다.

찬란한 봄같이 못 살다간 이천서씨 열녀비.
찬란한 봄같이 못 살다간 이천서씨 열녀비.

#. 고택들의 향연 ‘구름에’ 리조트

민속촌에서 계속 올라 성곽을 지나면 기와 고택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여기도 안동댐 수몰지에서 옮겨온 고택 7채를 2012년에 ‘SK’, 문화체육관광부, 경상북도, 안동시가 4자간 협의로 SK의 사회적 기업 행복전통마을에서 운영하는 ‘구름에’리조트다.

고택하면 귀신 나올 것 같고 불편하다고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2000년대 서울 북촌 한옥 살리기부터 전국적인 열풍이 불어 전남에는 지원해주는 정책으로 많은 한옥들이 들어섰지만 일률적인 모텔에 기성품 한옥 같아 느낌도 감동도 없다. 서울, 인천, 여수, 경주 등등 전국에 한옥호텔이 많이 들어섰다. 경주 ‘라궁’도 5성급 호텔요금으로 잠시 인기 반짝이다가 문 닫았다. 지금은 신라호텔에서 한옥호텔을 야심작으로 짓고 있다. 고택이주는 오랜 세월의 무게감을 현대 한옥에 어떻게 스며들게 하느냐가 관건이다.

갈수록 좁아지는 북쪽 골짜기에 제일 큰 계남고택을 맨 앞에 제일 작은 박산정(博山亭) 정자를 제일위에 알맞게 잘 배치해 놓았다. 밑에서 위로 위에서 아래로 고택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봄꽃에 파묻힌 돌담집과 이원모 고택.
봄꽃에 파묻힌 돌담집과 이원모 고택.

입구의 계남고택은 나라를 잃자 순국한 향산 이만도 등 독립운동가 25명을 배출한 도산면 하계마을이 수몰되어 옮겨온 고택이다. 정면 7칸 측면 7칸으로 퇴계 이황의 8대손 이귀용이 지은 종가다. 성리학으로 무장된 안동 선비들의 고택들은 화려하거나 웅장하지 않듯이 이 집도 규모는 크지만 담백하고 검소한 고택이다. 뒤에 칠곡고택은 퇴계의 10대손인 이휘면(1807~1858)의 고택(1831년 건립)을 이육사의 고향 원촌에서 옮겨온 고택이다. 나란히 붙어있는 3칸 서운정(栖雲亭) 정자는 탁 트인 서쪽을 한없이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자리 잡았다. 모든 숙소가 그러하듯 화장실을 어떻게 만드느냐가 관건인데, 서운정만 둥근 욕조 갖춘 숙소여서 목욕 좋아하는 분들의 취향을 저격했다.

중간에 우향각과 강동제사 주위에 붉게 물든 도화꽃이 핑크빛 봄을 알리고 있었다.

제일 위에 있는 박산정 정자는 집보다 마음 수양하는 정자에 더 심혈을 기울이는 안동의 정자 표본 같다. 아래 정자들과 마찬가지로 기둥이 크면 힘은 있어 보여도 부드러운 낭만이 흐르지 않는다. 이 박산정도 좌우 2칸을 방으로 두고 중앙 1칸을 대청마루를 두었는데 힘 있고 단단한 맛이 흐른다. 아궁이가 정면에 있어 이채롭다. 아래 정자들이 사각기둥을 사용했는데 원기둥이라 한결 돋보인다. 공조참의를 지낸 이지(1560~1631)가 학문수양을 위해 1600년대 초기에 지은 정자다.

 

사람없는 ‘구름에’고택에 복사꽃이 만발했다.
사람없는 ‘구름에’고택에 복사꽃이 만발했다.

32살 때 참담한 임진왜란을 당하여 동생들과 함께 의병에 가담했으니 인생 중반에 이런 정자를 짓고 누릴만한 참된 선비였다. 안동댐으로 인해 두 번이나 옮기는 운명이었지만 여기서 마지막 생이길 바라면서 옆 골짜기에 있는 한옥체험공간 ‘예움터 마을’을 둘러보았다. 구인당 좌우로 주자의 권학문, 매월당의 화개화사, 도연명의 권학문과 사시가 주련에 붙어있다. 주자의 시적이며 교훈적인 권학문보다 도연명의 직설적인 권학문 ‘젊음은 다시 오지 않고….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가 와 닿는다.

활짝 핀 벚꽃을 가슴에 안고 안동 시내를 빠져나오는 곳곳에 나부끼는 21대 국회의원 선거 문구는 가짜보수, 진짜 보수로 서로 도토리 키 재기로 항변하고 있다. 선비의 고장,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는 안동에서, 정치란 자신의 이익보다 사회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정치의 도(道)인데….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