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월관 마루에서 본 환성사 일주문 풍경. 환성사는 경산시 하양읍 환성로 392-30에 위치해 있다.

차는 대규모 공사현장 근처에서 길을 잃고 몇 번을 헤매다 쉬엄쉬엄 산길로 접어든다. 끊임없이 개발을 서두르는 도시의 풍경들을 순식간에 따돌리고 고개를 넘어 팔공산 깊은 자락으로 숨어든다. 마치 영겁의 세월을 거슬러 오르듯.

파스텔톤의 옷을 갑아 입은 분지형의 명당 터에 벚꽃이 부풀어 올라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사위는 조용하다.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부도밭을 서성이다 키 낮은 벚나무 아래에 서서 천년고찰을 올려다본다. 바람 한 점 없는 햇살 아래 벌들의 비행소리만 요란하다.

환성사(環城寺)는 성처럼 산자락에 둘러싸여 있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신라 흥덕왕 10년 헌덕왕의 아들인 심지왕사가 창건했지만 고려 말에 화재가 발생하여 사찰 일부가 소실되었다. 1635년 중건 후 여러 차례 불사를 거듭하여 현재는 대웅전과 심검당을 비롯한 여러 당우들이 아픈 기억을 지우고 좌선하듯 평화롭다.

일주문을 지나 수월관으로 향하는 흙길도 좋다. 옛것이 살아 숨 쉬는 곳에서는 또 하나의 시간을 돌아보며 감회에 젖을 수 있다. 아른거리는 벚꽃잎 그림자를 앞세우고 바람이 잠든 길을 걷는 이 순간이 참으로 감사하다. 저만치 계단 위에 서 있는 수월관이나 보물 제 562호 대웅전조차 궁금하지 않다. 계획하지 않은 봄날, 환성사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한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용연(龍淵)이라는 작은 연못이 기어이 나를 불러 세운다. 연못을 메우면 절이 쇠한다는 설화를 간직한 못이다. 절이 번창하던 시절, 게으른 주지가 손님 많은 것을 귀찮게 여겨 연못을 메우는데 물속에서 금송아지 한 마리가 나타나 슬피 울면서 날아가 버렸다. 연못을 완전히 메우자 절은 불에 타고 대웅전과 수월관만 남았다고 한다.

발길이 뜸한 환성사의 봄은 슬픈 옛 기억은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찬란하다. 초록빛 물 위에는 벚꽃잎이 하얗게 떠돌고 못가에는 백목련 한 그루와 누군가를 기다리는 빈 벤치가 그림처럼 처연하다. 나는 하나의 작품 속으로 걸어 들어가 벤치에 앉는다. 수월관이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고 나는 물가에 비쳤을 그 옛날의 수월관을 그려본다.

누하진입식으로 통과한 수월관 안마당에는 연화탑이라 불리는 특이한 석탑이 대웅전을 지킨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절의 배치가 오히려 안정적이다. 서원에 온 듯하여 신발을 벗고 수월관 난간에 기대어 앉는다. 바람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 벚꽃 만발한 이곳으로 이끌어 준 이는 누구일까. 일주문 쪽으로 곧게 뻗은 길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길은 모든 소리를 삼킨 채 벚꽃에 안겨 나른하게 졸고 있다.

적막한 산사에 가면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법구경이 그리울 때도 있지만 오늘은 숨 멎을 듯한 고요가 고마운 날이다. 일주문 쪽에서 벚꽃잎 아래를 걸어오는 노부부가 보인다. 두 손을 꼭 잡은 둘은 잠시 서로의 옷매무새를 고쳐주다가 또다시 손을 잡고 걷는다. 모자를 쓰고 마스크를 했지만 잔잔히 퍼지는 그윽함만은 감출 수가 없다.

봄날의 환성사에 어울리는, 꽃보다 아름다운 풍경이다. 나는 눈을 떼지 못한다. 지켜보는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들은 수월관 옆으로 난 계단을 올라 긴 담장을 끼고 벚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멀리서 전각을 감상한다. 불자가 아닌 듯한 그들의 조신한 행동에서 부처님의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뒤늦게 대웅전으로 향한다.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다포양식의 팔작지붕이 막돌로 쌓은 석대 위에 균형감 있게 앉아 있다. 깔끔한 외양과 달리 법당 안은 고색찬연함이 그대로 남아 있다. 색이 바랜 단청 사이, 천정에 달려 있는 용 모양의 종이 이색적이다. 파이프 오르간과 비슷한 용도로 종에 줄을 달아 당기면 위에서 신비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고 한다. 하지만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고 오늘날에는 스님들조차 용도를 아는 이가 드물다고 한다.

통판에 투각을 한 수미단도 목공예 작품을 보듯 훌륭하다. 책에서만 보던 가릉빈가 한 마리가 푸드득 내 눈으로 날아든다. 머리는 사람이지만 새의 몸을 한 인두조신(人頭鳥身)의 기이한 형태, 소리 또한 묘하고 아름답다는 상상의 새다. 가릉빈가 울음소리가 들릴 것만 같아 귀를 기울여보지만 인간의 이기심으로 지구상에서 멸종된 도도새만 떠오른다.

조낭희 수필가
조낭희 수필가

영원히 듣지 못할 울음소리, 무엇으로도 저울질 할 수 없는 인간의 욕심이 존재하는 한 가릉빈가는 경전 속에서만 살아가야 하리라. 바람 불어 벚꽃이 휘날리는 날, 좋은 사람과 함께 환성사를 찾고 싶다. 젊은 날엔 홀로 드나들 수 있는 찻집 하나 간직하길 원했다면 이제는 좋은 절에 가면 누군가를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행복은 자주 불러주고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 주변을 맴도는 작은 행복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날마다 가릉빈가가 날아와 울지 않을까. 가릉빈가 울음소리가 궁금하다. 어쩌면 아침마다 설중매 가지에 날아들어 배설물을 난사한 뒤 사라지는 참새 떼나 뒷산에서 구슬피 우는 멧비둘기 울음처럼 지극히 평범할지 모른다.

우리는 귀한 것일수록 멀리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