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희<br>인문글쓰기 강사·작가<br>
유영희
인문글쓰기 강사·작가

많은 사람들이 전원생활을 꿈꾸는 이유는 경쟁 없는 삶, 자연과 하나 되는 삶을 갈망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는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자연과 함께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소로의 ‘월든’(1854년)은 고전 중의 고전이다. ‘월든’은 소로가 월든 호수 북쪽 토지에 오두막을 짓고 1845년 7월 4일부터 2년 2개월 간 살았던 이야기를 쓴 책이다. 소로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소로는 ‘인생의 본질적 사실만 직면하기 위해, 인생의 정수를 살기 위해’ 오두막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독자들은 이 책이 자연의 섭리에 따라 ‘실재’에 입각해서 간소하고 밝고 자유롭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며 소로의 월든 생활을 동경한다.

그러나 그의 삶을 따르고 싶다고 해도, 그 주장이 얼마나 타당한지는 잘 따져보아야 한다. 실천에는 많은 위험이 따르기 때문이다. 소로는 간소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하루 세 끼의 식사도 필요하다면 한 끼로 줄이고, 백 접시는 다섯 접시로 줄여나가자고 한다. 이런 표현을 문학적 수사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제로 자기 삶에 적용하려 든다면 문제가 생긴다. 극단적인 금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소로는 10센트밖에 없는 상태에서 할로웬 농장을 사려다 농장 주인이 취소하면서 위약금으로 10달러를 주겠다고 하자 거절한 후 이런 사색을 한다. “내가 10센트를 가진 것인지, 농장을 가진 것인지, 10달러를 가진 것인지 또는 그것들 모두를 소유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10달러도 농장도 받지 않았다. 이미 농장 경영의 꿈은 충분히 이루어진 상태였으니까” 이 말은 궤변처럼 들린다. 보통 사람이라면 10센트로 농장을 사려고 하지도 않았겠지만, 종자는 샀으니 농장 경영의 꿈을 이루었다는 말도 이해하기 어렵다. 소로는 농사짓는 일에도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농사짓는 젊은이들을 토지의 노예라고 하면서 안타까운 눈으로 보았다. 소로는 월든에서 노동을 최소화하고 정신적인 삶을 살고자 했다. 이런 생활이 삶의 정수요, 자연의 섭리에 입각한 삶이라고 읽을 근거는 없다.

생태계 파괴가 심각하니 자연의 섭리에 따르자는 명제는 너무나 당연해보이지만, 어떻게 살아야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농사일에 지친 이에게 밭은 어미의 자궁과 같다는 말이 무슨 위안을 줄 것이며, 하늘에 나는 새가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이 새처럼 살 수도 없다.

‘월든’이라는 책은 자연을 묘사한 수필 문학으로서의 가치는 크지만, 월든에서의 삶까지 엄청난 가치를 둘 일인지는 잘 따져보아야 한다. 집필을 위한 한시적 칩거 생활로서는 의미가 있겠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섣불리 실천에 옮겼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자신이 딛고 있는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 일이 나에게 어떤 가치를 주는지 잘 살펴보고 실행하는 것이 좋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좋아보여도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