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룡 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정조는 세손시절부터 논어에서 증자가 말한 ‘나는 날마다 세 가지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에 대해 반성한다.’는 글귀를 좇아 스스로 반성하는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자신의 언행과 학문을 기록한 ‘존현각일기’를 기록한다. 이 책은 1783년부터 임금의 개인 일기에서 규장각 관원들이 시정(施政)에 관한 내용을 작성한 후 왕의 재가를 받은 공식적인 국정일기로 전환되었다. 1760년부터 1910년 8월까지 임금의 입장에서 조정과 내외의 신하에 관련된 내용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일성록(국보153)’은 이 존현각일기로부터 시작된다. 조선왕조실록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일본인들이 중심이 되어 편찬되었기에 그 공정성과 사실의 정확성을 기대하기 힘들다. 승정원일기 또한 많은 부분이 소실되어 개수하는 일이 자주 있었으므로, 진실된 역사기록으로서의 일성록은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동부는 구(舊) 병민 146명과 신(新) 병민 5명, 남부는 구 병민 502명과 신 병민 21명, 서부는 구 병민 112명과 신 병민 6명, 북부는 구 병민 314명과 신 병민 7명입니다. 신구 병민 총 1천113명 가운데 나아서 도성으로 돌아간 사람이 94명, 사망한 사람이 7명, 현재 앓고 있는 사람이 154명, 나아지고 있는 사람이 858명이며 현재 남아 있는 병막(病幕)이 421곳이니 지난번에 비하여 현저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구 병민 중에서 굶주림과 곤궁함이 더욱 심한 자 13명을 뽑고 신 병민 중에서도 22명을 뽑아 총 35명을 건장한 자와 약한 자로 구별하여 규례대로 쌀을 지급해 주었는데 총 11말입니다.’

위 기록은 정조 12년(1788) 5월 중순부터 도성에 역병이 돌기 시작한 뒤 두 달쯤 지난 7월 19일에 비변사의 담당 낭청이 병민의 치료와 관리현황을 보고한 내용으로 전후의 과정을 포함하여 일성록에 소상하게 실려 있다. 전대미문의 이러한 구체적인 보고와 유기적인 노력이 계속 이어지던 끝에 위에서 본 7월 19일의 보고에서 총 1천113명의 환자 중에 새 환자는 39명 정도로 현저히 줄었다고 하였던 것이다.

정조는 세손 시절에 영조를 간호하면서부터 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수민묘전(壽民妙詮)이라는 의학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그 서문에서 ‘사람을 치료하는 이치나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가 똑같다.’라고 하고 나라도 폐단의 근원과 실정이 각기 다르니 이를 밝혀 처방을 찾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국정운영에 그대로 반영되었던 것이다. 230여년이 흐른 지금 코로나19의 유행으로 세계 물류체계가 마비되면서 모든 경제활동은 위축되고 경기가 침체되어 삶의 질은 떨어졌다. 정부에서 긴급재난지원금 신청을 받으나 실제지급방식은 여전히 안개속이다. 다행이 지자체에서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나 일부에서는 지급기준에서 형평성 논란이 일고 있다.

오늘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열악한 의료 환경 속에서도 백성의 생명을 지켜줘야 하는 국가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실정에 맞게 지휘해 나간 정조와 최선을 다한 신하들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거울로 삼을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