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거의 매일 형산강 하류의 물을 본다. 근 10년째 자전거로 출,퇴근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형산강 둑에 조성된 자전거길을 달리며 강물과 물빛을 대하게 된다. 가끔씩 물안개가 피어나는 아침과 노을이 얼비치는 저녁 무렵에 바라보는 형산강은 시시각각 형색을 달리하지만, 언제나 유유히 바다를 향해 쉼없이 흘러가고 있다.

하류의 형산강은 여유롭고 넉넉하기만 하다. 강폭이 넓고 완만한 물길 탓인지 강물은 흐르는 듯 멈춘 것 같고 멈춘 듯 흐르는 것 같다. 발원지에서 약 60여km를 밤낮없이 달리고 부지런히 흘러와 지척의 종착지를 앞두고 안도하면서 가뿐 숨을 고르는 듯하다. 형산강 하류에는 많은 것들을 품고 있다. 흐르는 물결따라 다수의 동,생물이 서식하고 철새가 도래하는가 하면, 둔치에는 갈대와 억새를 비롯한 무수한 초목이 자생하고 있다. 구비구비 흐르면서 너른 들을 적신 후 하류에서는 마치 배려와 포용의 가슴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생명을 생장시키고 더불어 공생하는 터전을 마련해온 듯하다.

지난 3월 말경 섬진강 종주 자전거 라이딩을 다녀왔다. 전북 임실군 강진면 섬진강댐을 기점으로 전남 광양시 배알도수변공원까지 이르는 총 153km를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아들과 함께 달리면서 한껏 유쾌함을 누렸다. 강진~순창~남원을 지나는 상류는 거의 계류(溪流) 수준으로 간혹 협곡 사이의 강폭이 좁고 천탄(淺灘)을 군데군데 드러내며 빠르거나 늦은 유속으로 산골과 물가의 풍경을 담고 있었다. 이어 곡성~순천~구례 주변의 지류와 하천, 작은 강과 합류되는 중류는 강의 너비와 수량, 수심이 변하면서 완급의 물길로 접어들었다. 이윽고 구례~하동~광양으로 이어지는 하류지역에서는 너른 강바닥에 모래톱을 밋밋하게 펼쳐놓고 서두름없이 산과 들과 마을을 휘돌아가며 바다에 이르고 있었다. 호남정맥 계곡을 타고 흐르는 청정한 섬진강 언저리를 봄바람 속에 달리니 신나기 그지 없었고, 특히 구례에서 하동까지 이어지는 70리 벚꽃길은 덤으로 누리는 호사가 아닐 수 없었다.

물길을 따라 나란히 달리면서 많은 것을 느낀 여정이었다. 세찬 여울이나 협곡을 거침없이 흐르는 상류의 물살은 청년의 패기처럼 보였고, 합류와 집수로 더디거나 빠르게 흐르는 중류의 굳센 강줄기는 중년의 왕성함으로 여겨졌으며, 여유롭게 휘돌아가는 하류의 수면은 인생행로의 달관과 초탈을 겪은 노년의 느긋한 몸짓으로 비춰졌다. 그러면서 앞서기를 다투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水流不爭先)을 보며 나를 되비춰 보고, 파란만장한 삶의 여로에 주야장천 흐르는 물(川流不息)처럼 과연 나 자신도 끊임없이 정진하고 있는지 성찰해보기도 했다.

물(水)이 흘러(去) 법(法)이 되었듯이 물은 순리이고 이치다.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막히면 돌아가고 패인 곳을 채운 뒤에 나아가는(盈科後進) 물은, 기꺼이 낮은 곳이나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세상 만물에 생기를 주고 성장하게 하는 자양분 같은 물이 고맙고 경이로울 따름이다. 때때로 윤슬로 화답하는 물을 닮아가며 오늘의 페달을 힘차게 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