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누구에게나 남다른 기억이 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져도 기억의 사진첩에서 지워지지 않을 아름다운 경험은 삶을 풍성하게 인도한다. 요즘 정부와 지자체, 정치권에서 활발하게 논의되는 ‘긴급재난지원금’은 오래전에 잊힌 사건을 소환한다.

러시아 문학을 연구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환경 때문에 서도이칠란트로 유학을 가야 했던 시절의 일이다. 소련과 중국을 적성국(敵性國)으로 분류하여 학문을 위한 최소한도의 자료마저 차단함으로써 반공을 넘어 멸공 공화국을 꿈꾼 박정희-전두환 시대. 그런 이유로 적잖은 연구자가 일본이나 미국, 유럽으로 유학을 떠날 수밖에 없던 암흑기.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한반도가 세계의 관심을 받았던 무렵의 이야기다.

쾰른에서 어학과정을 마칠 무렵 아이가 태어났다. 당시 도이칠란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분단상태였다. 서도이칠란트에 주둔한 미군이 20만을 헤아리고, 국민 1인당 GDP가 2만 달러 부근이었던 때였다. 그런 나라가 10만이 넘는 외국 유학생들을 무상으로 교육하고 있었다. 피부색과 국가와 언어를 불문하고 서도이칠란트 학생과 외국 유학생을 똑같이 대우한 나라.

아이가 태어나자 1년 동안 양육비(Erziehungsgeld)로 다달이 600마르크 (한화 27만원), 어린이수당(Kindergeld)으로 50마르크를 주는 것이었다. 속지주의를 채택한 나라의 법률에 따라 아이는 자동으로 서도이칠란트 국민으로 편입되었다. 노동자 자식이든, 재벌 자식이든, 외국인 아이든 간에 똑같이 양육비와 어린이수당을 준 서도이칠란트. 이런 혜택을 일일이 거론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더욱 큰 놀라움은 베를린에서 이어진다.

지도교수를 찾아 1989년 초에 서베를린으로 이주한 나는 그해 여름 중소기업 ‘게오르크 렘케’에서 6주 동안 육체노동 아르바이트를 한다. 하루 6-8톤의 물량을 컨베이어 벨트로 처리하는 중노동이었다. 거기서 나는 분단상태의 서베를린 시민에게는 양육비가 2년간 지급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구청의 양육비 담당자에게 에이4 용지 1매 분량의 편지를 쓴다.

‘서도이칠란트의 학문발전을 위해 학위논문을 준비하고, 경제발전을 위해 ‘게오르크 렘케’에서 노동한 나에게 양육비를 지급해달라’는 내용이었다. 2주 후에 나는 ‘미지급된 양육비를 다달이 나의 계좌로 송금하겠다’는 담당자의 답장을 받는다. 600마르크의 양육비를 아무 조건 없이 추가 지급하겠다는 편지를 받은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참, 대단한 나라로군! 하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10만이 넘는 외국 유학생들을 공짜로 교육하고, 각종 혜택을 자국민과 똑같이 베푼 분단의 나라 서도이칠란트. 얼마 전 통일 도이칠란트는 코로나19로 인해 곤경을 겪는 내외국인에게 긴급재난지원금 5천유로(한화 673만원)를 지급했다. 지급에 걸린 시간은 단 사흘. 포퓰리즘 얘기는 아예 나오지도 않았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국가다! 예전의 특별한 기억을 소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나의 조국에서도 실현했으면 하는 바람이 커지는 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