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육사 고택

고향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 이육사.
고향 마을을 바라보고 있는 이육사.

흔히 죽음에 대해서 아무도 모르는 3가지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를 모른다는 것이고, 누구나 아는 것 3가지는 누구나 죽고, 오는 순서 있어도 가는 순서 모른다는 것과 아무도 동행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인생은 무엇을 먹고 사는 것 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듯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던 자신을 위하던 죽음은 숭고한 의미를 지닌다. 이육사!

그 이름만으로 우리민족의 가슴에 뜨거운 불덩어리 기운을 안겨 주었다. 이육사가 나고 자라 혁명적 자양분을 흠뻑 받았던 고향 원촌마을과 묘소, 안동시내로 옮겨놓은 고택을 숙연한 마음으로 찾아 나섰다.

 

방치되어 있는 이육사 생가.
방치되어 있는 이육사 생가.

#. 나라 위해 몸 바친 숭고한 사람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에다 농경 정착생활이라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지만, 유목민들이나 척박한 땅에서는 생존을 위해서 남의 것을 빼앗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조건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약 1천여번이나 외침을 당하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때마다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의병이 되어서 바람 앞에 등불인 나라를 구했다. 당시 세계최강 중국 수나라와 당나라, 몽고와의 끈질긴 전쟁과 7년의 임진왜란 등등의 국난을 당할 때 마다 온 백성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적의 침입을 막아냈다.

이육사(1904~1944)가 살았던 조선말을 보자.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권 쟁탈전이 된 조선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민영환(1861~1905)은 조약파기와 찬성파 대신들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결국 “영환은 한 번 죽음으로써 우러러 황은에 보답하고 우리 이천만 동포형제에게 사죄 하노라.” 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민영환은 명성황후의 척족이라 일찍부터 출세의 길이 열려 고위직에 있었고, 그의 자결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켜 백범 김구와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으로 몰려가 땅을 치며 통곡했다.

당대 최고의 권문세가 출신인 민영환이 자결하자 ‘자결’ 도미노 사태가 전국으로 번져나갔고, 의병들은 명성황후시해사건(을미왜변) 이후 전국에 들불처럼 일어났다. 나라 망한 일제강점기에 양녕대군 16대손 왕족이라고 내세운 이승만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 두 번이나 장원하고도 나라의 혜택을 받지 못한 매천 황현(1855~1910)은 “나라가 선비를 양성한지 500년이나 되었지만, 나라가 망하는 날 한 명의 선비도 스스로 죽는 자가 없으니 슬프지 않은가. 하면서 절명 시 ‘새와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낮을 찡그린다./ 무궁화 이 강산이 속절없이 망하였구나./ 가을 등잔불 밑에 책을 덮고 수 천 년 역사를 회고하니/ 아 참으로 이 세상에서 지식인 노릇하기 어렵구나.’ 등의 절명 시 4수를 남기고 더덕 술에 아편 타마시고 순국한 선비도 있다.

 

이육사 생가 대문과 유치찬란한 벽화.
이육사 생가 대문과 유치찬란한 벽화.

#. 혁명가 이육사

지금이야 어디서 태어나 어디에 살던 여기저기 옮겨 사는 유목민적 삶이라 태어난 고향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80년대 중반까지의 고향은 절대적인 자양분을 받았다. 그래서 작가는 어릴 때 형성된 정서로 평생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 이육사가 16살까지 살았던 고향 원촌은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저 멀리 산들이 병풍처럼 줄지어 서있고 낙동강이 푸른 물 간직한 채 절벽의 바위를 때리고 자갈에 부딪히면서 모래를 적시고 흘렀다. 산을 등지고 있는 마을은 옹기종기 모여 살았고, 강과 마을 사이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말달릴 수 있는 넓은 벌판이 펼쳐져있다. 가히 무릉도원이라 할만하다.

이런 고향분위기지만 이육사는 고단한 시대에 태어나 식민지 현실에 정면으로 부딪치며 헤쳐나가다 감옥에서 순국 했다. 어머니 허길 여사는 대법원장 출신 의병장 허위(1854~1908)의 4촌형 범산 허형의 딸이고 퇴계의 진성이씨 집안에 안동의병장 이인화부터 수많은 독립지사들 집안이었으니 6남매 모두 독립운동가였다. 이육사는 17살 되던 1920년 온 가족이 대구 남산동으로 이사 갔었고, 이미 한학을 했지만 일본과 중국유학을 한다. 1925년에 형 원기 동생 원유와 함께 약산 김원봉(1898~1958)이 이끄는 항일무력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고,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으로 3형제가 대구형무소에 3년 복역한다. 그때 수인번호가 264번이라 이원록에서 이육사로 바꾼다. 기자생활(1929~1937) 8년 하면서 1931년에 대구격문사건으로 두 번째 구속되고 풀려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입학하여 졸업 희곡작품이 “토지가 농민에게 공평하게 분배되고, 완전한 노동자, 농민이 지배하는 사회”를 꿈군 ‘지하실’이다. 17번이나 투옥과 구금되었으나 강철 같았던 의지의 이육사는 1944년 1월 16일 새벽 5시에 베이징의 일본총영사관 지하 감옥에서 한 많은 가슴을 부여잡고 눈을 감았다. 유골은 먼 친척 이병희와 동생 원창에게 전해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0년대 고향 뒷산에 부인 안일향 여사와 나란히 누워있다.

이육사의 첫 시는 1933년 ‘황혼’, 39년에 ‘청포도’, 유고집에 ‘광야’등 총 36편의 시를 썼다. 100여 편의 시를 쓴 윤동주는 일본유학 가기위해 창씨개명 했지만, 맑은 영혼으로 자아를 성찰하는 아픈 마음으로 쓴 시가 참회록이었다면, 이육사는 가슴에 강철 같은 뜨거운 불덩이안고 맑고 웅혼한 시어를 폭포수같이 품어낸 혁명가이며 독립운동가, 시인 이였다.

 

이육사 딸 이옥비님이 살고있는 목재고탁.
이육사 딸 이옥비님이 살고있는 목재고탁.

#. 생가와 기념관

이육사문학관이 있는 고향 원촌마을은 예전에도 몇 번 왔고, 이번에는 매주 왔지만 안 가 본 묘소와 안동시내로 옮겨온 생가도 지금 모습 보려 늦은 오후에 안동으로 출발했다. 남쪽과 북쪽의 위도 차이로 경주는 꽃 봄이 완연하지만 안동은 지구가 자전하는 만큼의 속도로 천천히 꽃 봄이 오고 있었다. 춘분이 지난 4월 초순이라 6시가 지났는데도 하늘에 해는 밝았다.

안동시내 태화동 비탈진 언덕에서 마주친 생가는 꼭 철거를 앞둔 방치된 집 같아 참담했다. 입에서 욕이 주저리주저리 나왔다. 정갈하게 수리하여 문화재 돌보미 한명이라도! 이육사가 어떤 사람인가.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청포도)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한(광야)- 시 한 구절에 얼마나 가슴 조였던가. 그런데 생가를 이렇게 방치하다니. 문패도 대문 열쇠도 녹슬고 잠겨진 채 있었고, 좁은 마당에 활짝 핀 앵두꽃도 애처로운지 꽃 웃음도 흘리지 않았다.

원촌마을에 들어서니 어둠이 내려앉아 불빛만 전설을 간직하고 있었다. 문학관 입구에는 강철 같은 선비 혁명가 시인이 고향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학관 위에는 생가가 원형이 변질되어 생가로서의 기능이 훼손되어 고증을 거쳐 육우당(육형제 우의를 기린다는)을 복원해 놓았다고 했다. 참으로 소가 웃을 일이다. 어떤 자가 고증했기에 이따위로 했는지 기가 찬다. 일부는 원형이 변질되었더라도 그 생가를 보완해서 세워야지 오리지널 진품을 두고 모조품 만든 격이다. 1976년 안동 태화동에 안동댐 수몰로 옮겨놓은 생가는 방치는 되었지만, 70~80%는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문학인들이나 큰 스님들 생가 복원 하는 것 보면 눈뜨고 못 본다. 산청에 성철스님 생가 복원해 놓은 겁외사는 생가는 온데간데없고 으리으리한 한옥에 웅장한 절, 그리고 스님의 동상까지 세워놓아 산청군과 제자들은 검소했던 성철스님을 똥칠했다. 경주에 박목월 생가는 흔적도 없고 그 위 언덕에다 이상한 건물을 지어 놓고 동리목월문학관을 국민세금으로 수백억 들여서 불국사 옆에다가 세워놓았다. 스승을 핑계 삼아 문화가 뭔지도 모르는 안목 없는 제자들의 경로당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일반사람들은 향기를 못 느끼게 해놓았다. 이 육우당도 이육사의 채취와 향기도 없고 영혼 없는 박제된 건물이라 안타깝다. 날은 점점 어두워 산길 이육사 묘소에 한참을 오르니 등위에는 반달 지나 보름으로 커가는 달빛이 산길을 비추고 있었다. 아직도 2km 남아 혼자서 망설이다 아쉬운 발걸음 되돌려 내려왔다.

문학관에서 조금 내려오면 청포도 공원이 생가 터였고, 그 옆에 고택다운 운치 있는 목재고택이 단정히 앉아있다. 그 고택에는 이육사 아들은 일찍 죽었고, 1943년 청량리역에서 북경으로 압송되어가면서 욕심 없이 남을 배려하라고 지어준 4살 딸 옥비(沃非)에게 ‘다녀오마’ 마지막 말 남기고 생이별한 딸이 살고 있다. 그 옆 진성이씨 원촌파 종손 이재철 변호사의 ‘원대고택’은 필자가 옮기지 말고 수리만하라고 자문해준 집이고, 그 옆에 사은구장 고택은 독립운동가 이원영 목사집이다. 가슴이 아픈 만큼 밤하늘도 어둡다. /글·사진=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