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원사 삼층석탑과 대웅전. 내원사는 경남 산청군 삼장면 대하내원로 256에 위치해 있다.

지리산의 봄은 물소리로부터 시작된다. 지리산 가는 길은 온통 봄꽃이 피어 열병을 앓는데 깊은 계곡에 몸담고 있는 내원사는 어쩌면 저토록 차분하기도 할까. 내원계곡과 장당계곡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여 절의 양쪽으로 지리산의 청정 계곡이 흐르는 까닭만은 아니리라.

내원사(內院寺)의 옛 이름은 덕산사(德山寺)였으며 통일신라시대 무염국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무염국사는 무열왕의 후손으로 중국 마조 문하의 법맥을 이루었으며 동방의 대보살로 일컬어졌던 분이다. 무염의 법은 충남 보령에 소재하는 성주사의 일맥을 이루어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문이 되었다.

덕산사는 이후 천여 년을 면면히 이어오다 조선 광해군 1년(1609년)에 원인모를 화재로 소실된 채 수백 년 방치되었다가 1959년 원경스님이 절을 다시 세우고 이름을 내원사(內院寺)라 하였다. 내원(內院)은 도량이 느껴지는 불교 용어로 도솔천에 있는 선법당을 말한다. 미륵보살이 살면서 설법을 한다고 하니 절 이름만으로도 깊고 심오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사찰이다.

계곡 건너편 높다란 석축 위에 쌓아올린 담장과 그 위로 고개를 내미는 기와지붕들, 절은 결코 웅장하거나 화려하지 않으며 아담하고 고요하다. 물소리가 예불 소리를 대신하는 반야교를 건너는 동안 이미 세속의 때는 벗겨진다. 노선비의 곧은 숨결 같은 경내로 들어서는 발걸음만 조심스럽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들떠 있는 봄조차 내원사의 담장을 넘지 못하고 비켜가는 걸까.

절은 봄소식에는 무심한 듯 돌아앉아 묵직하다. 무언가에 끌려 들어서는데 검붉은 색을 띤 삼층석탑이 온몸으로 안겨든다. 보물 제 1113호 삼층석탑은 철분이 많은 석재로 만들어진 것인지 온통 붉은 빛깔로 얼룩져 있다. 1609년 큰불이 났을 때 화마가 할퀴고 간 상처인지도 모른다. 우주와 탱주가 굵게 모각되어 튼튼해 보이지만 비바람에 버텨온 노쇠함은 감출 수가 없다. 안내문에는 무열왕 때인 657년에 세워졌다고 하지만 통일신라 말기에 건립되었다는 설도 있고, 고려시대에 건립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사학자가 아닌 내게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고단한 역사를 안고 서 있는 탑 앞에서 끊임없이 표류하던 자아도 닻을 내린다. 불법을 수호하며 나라를 지켜온 고대부터 빨치산과 마지막 토벌전을 벌이던 근래의 아픔까지 탑은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우리의 역사가 응축되어 살아 숨 쉬는 위대한 석탑은 지난한 풍파 속에서도 천년의 기품을 잃지 않는다. 훼손이 심하다. 인적이 없는 내원사, 허리 휜 할미꽃들만 옹기종기 모여 앉아 탑을 지킨다.

대웅전도 단청이 벗겨져 나이보다 깊고 쓸쓸해 보인다. 잎 새 뒤에서 수줍게 꽃을 피우는 연륜 깊은 동백나무와 은목서 한 쌍의 깊은 눈빛, 스님의 법복이 걸려 있는 대웅전 법당에서 느껴지는 훈기와 안온함, 게다가 대부분의 전각들이 작고 소박한 것은 얼마나 고맙고 사랑스러운가. 향냄새에 몰려나오는 한 때의 가난과 아픔조차 우리에게는 소중한 역사이지 않은가.

국보 제 233-1호 동양 최초의 비로자나불이 있다는 안내판을 따라 들어선 비로전 법당에는 삼층석탑만큼이나 가슴 뭉클한 비로자나불상이 봉안되어 있다. 불상 앞에 서는 순간 전율이 느껴진다. 동아시아를 통틀어 명문이 밝혀진 최초의 지권인 비로자나석불, 얼얼한 울음과도 같은 감동이 온몸을 휘감는가 싶더니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단아한 눈, 단정한 코, 작고 예쁜 입, 볼록한 뺨의 양감이 돋보인다는 안내문과 달리 아무리 찾아보아도 석불의 표정은 잡히질 않는다. 온화하게 웃고 있는 것도 같고 고통으로 힘겨워 하는 것도 같다. 입자가 거친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마멸이 심하다. 세월은 너무 많은 것을 앗아가 버렸고 또 여전히 많은 것을 남겨 두었다.

조각 솜씨는 거칠지만 오랜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어 감동은 배가 될 수밖에 없다. 표정 없는 불상 앞에서 어쩌자고 내 가슴은 자꾸 아련해지는가. 지리산 골짜기 인적도 드문 절에 숨어 있듯 살아가는 삼층석탑과 비로자나불상의 심한 마멸과 상흔은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우리는 무엇에 기뻐하며 무엇을 향해 살아가는지를.

조낭희 수필가
조낭희 수필가

석조비로자나불상과 함께 있었던 국보 제 233-2호 납석사리호는 현재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명문을 통해 혜공왕 2년(766년)에 석조비로자나불상을 조성하여 무구정광대다라니와 함께 석남암수 관음암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역사적 의미가 크다. 반야교를 걸어 나오는데 무언가로 가슴이 뿌듯하다. 그런데도 왜 자꾸 뒤가 돌아 보이는 것일까.

잃어버린 시간과 잃어버린 기억을 찾고 싶으면 지리산 골짜기에 있는 내원사로 가라. 물소리 홀로 내원사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그대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봄조차 차마 들어서지 못하고 비켜가는 스산한 적요 속에 당신의 모든 것 내려놓고 한 떨기 꽃이 되어보라.

그리운 사랑 하나, 그대 가슴에 달처럼 차오를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