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향산 고택과 치암 고택

향산과 주손 이동석 수목장.
향산과 주손 이동석 수목장.

사람은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떤 처신을 하는가가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특히 나라를 잃었을 때 조국과 민족을 배반하고 자신의 영달을 꾀한 짐승보다 못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으면서 자신의 목숨도 버린 가슴 뭉클한 독립투사도 있다. 사람을 보는 기준은 다양하지만 죽음부터 역 추적해 보면 그 사람의 진면목을 강렬하게 알 수 있다. 안동은 기초단체로는 제일 많은 353명이 독립운동으로 포상 받은 독립운동의 성지다.

향산 고택과 치암고택 가기 전에 향산 이만도((1842~1910) 선생이 순국했던 예안 인계리 순국유허비를 보고 태어난 하계마을과 치암 이만현(1832~1911)의 고향 원촌마을을 보고 갔다.

#. 나라운명의 변곡점과 독립운동의 요람 안동

‘추로지향(鄒魯之鄕)’. 추나라 맹자와 노나라 공자 고향의 출생지를 딴 이 한마디로 안동은 유학의 본 고장임을 입증한다.

그러나 신라 고려시대까지는 불교문화가 융성하여 성덕왕 23년(724)에 만든 강원도 상원사 (왕실(세조)의 원당이었음) 범종은 성덕대왕 신종(경덕왕 1년·742)보다 18년이나 앞서는데, 조선 8도에서 가장 좋은 종으로 선발해 갔다. 소리가 웅장하고 맑아 백리(40km)까지 울렸다는 이 종은 원래 안동에 있었던 것이다.

봉정사의 극락전도 부석사 무량수전보다 앞선 시기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다. 현존하는 국내 전탑 5개 중에서 여주 신륵사와 칠곡 송림사 전탑 외 법흥사지 7층 전탑, 일직 조탑리 5층 전탑, 안동역 앞의 운흥동 5층 전탑 등이 모두 안동에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안동은 나라의 운명을 가르는 중요한 고비마다 결정적 역할을 한다. 930년 후삼국 각축의 혼란기에 고려의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안동 병산전투에 안동의 토호세력 김행, 장길, 김선평의 향군들 도움으로 견훤 군사 8천명을 무찔러 후삼국 통일의 확고한 기틀을 만들어 고려가 후삼국을 평정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나라 대개의 성씨가 그러하듯 태조 왕건은 김행(金幸·안동 권씨), 장길(張吉(장정필)·안동 장씨), 김선평(金宣平)·안동김씨)에게 삼태사(三太師)로 공훈을 기렸다. 그리고 1361년 홍건적 난으로 공민왕(10년)은 수도 개경(개성)에서 안전한 복주(안동)에 피신 왔다. 유학이 건국이념인 조선왕조에서는 퇴계 이황의 우뚝한 유학자에 선비의 고장이 되었고, 명재상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참혹한 위기 때 국난극복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한입합방으로 나라가 망하자 안동의 선비들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가솔들을 데리고 만주로, 단식으로 순국하고, 만세운동으로 나라 찾는 숭고한 일에 일생을 바친다. 고성 이씨 임청각, 의성김씨 집성촌의 내앞 마을과 진성 이씨 하계, 원촌마을에 수 십 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된 명예로운 안동이었다.

 

단정하고 소박한 치암고택 안채.
단정하고 소박한 치암고택 안채.

그러나 오늘날 안동은 과연 ‘한국정신문화의수도, 선비의 고장’다운가? 상징적인 사건이 2019년 5월 김종길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장은 자유한국당(통합당) 황00 대표가 안동에 왔을 때 “보수가 궤멸해가는 이 어려운 처지를 건져줄 우리의 희망의 등불이요, 국난극복을 해결해줄 구세주”고 라고 추켜세웠고, 박원갑 경북 향교재단 이사장은 “100년마다, 1세기 마다 사람이 난다 그러는데 건국 100년, 또 3·1절 100년에 나타난 것이 황00 대표”라고 주장했다. 왕조시대보다 더 심한 마치 맹신도가 사이비 교주에게 하는 소리 같아 참담했다.

다행히 “안동을 대표하는 유림이 한 정당 대표에게 ‘희망’ ‘등불’ ‘구세주’라고 칭송했다.”“선비라면 정치권력에 쓴 소리와 바른말을 해야지 아첨이나 하고 있으니 안동출신으로 너무 부끄럽습니다.” “친일적폐 속물적 부유로 변질한 소인배 유림을 규탄하고 그릇된 유림의 역사인식과 현실풍토를 성토하기 위하여 안동 문화의 거리에서 1인 시위를 한다”는 서애 류성룡의 14대손 류돈하(38)같은 참 선비다운 젊은 분이 있어 위안을 삼았다.

#. 지조의 선비 향산 이만도와 부끄러움을 아는 치암 이만현

져버린 매화를 대신하여 진달래, 개나리, 살구꽃, 자두꽃, 도화 꽃에 벚꽃 마저 활짝 피어버린 경주를 뒤로하고 안동으로 향했다. 산천은 화사한 꽃단장할 자신의 역할을 서서히 준비하고 있었다. 안동 북으로 조금가자 길옆 바위에 새겨놓은 ‘자력갱생’이 왜 ‘각자도생’으로 연결되고 꽉낀 마스크는 ‘자가격리’ ‘원천봉쇄’가 연상될까. 와룡 지나 예안 인계리 가는 길은 가난해도 이웃과 정 나누며 오순도순 살았을 억척스런 안동사람들이 연상된다. 향산 선생이 순국했던 장소는 도로 옆에 비석만 쓸쓸히 서있고. 옆에는 향산의 주손 이동석 시민운동가의 수목장한 소나무가 푸른 향기를 품고 있었다. 앞면은 백범 김구가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지기 전 마지막 쓴 글씨고 뒷면은 위당 정인보의 유려한 문장으로 새겨져있다.‘향산 공원’이라 해 놓았는데 이렇게 작은 공원은 처음 봤다. 여기서 향산 고택이 있던 하계는 강 건너 직선거리 7km로 멀지않지만 안동댐으로 한참을 돌아야했다. 가는 길에 도산서원에 만개한 매화의 짙고 그윽한 향기 보고, 듣고, 음미하며 퇴계 종택에 갔다. 굳게 닫힌 솟을대문에는 손소독제가 잡귀 쫓는 벽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안동댐으로 사라진 하계마을은 산비탈 경사진 퇴계묘소에서 내려다보니 흔적도 없고 저 멀리 강물은 말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산 고개 넘어서면 이육사 생가 터에 문학관이 들어서 있고 꽤 넓은 벌판이 펼쳐져있다. 이 마을에서 치암 이만현은 퇴계 11대손으로 나라 잃자 비분강개해 세상을 떠났다. 바위에도 부끄러워한다는 치암(恥巖) 이만현의 고택이 있던 자리에도 강 버들만 무심히 늘어서있다.

이제 안동시내 안막동 좁은 산골짜기로 옮겨온 향산과 치암의 고택을 찾았다. 치암 고택은 4칸으로 큰집은 아니어도 절제된 균형미에 1칸은 정자형식의 누마루를 만들어 소박하고 단정한 낭만이 흘렀다. 고택체험 숙소로도 개방하여 하나하나에 손이 많이 간 고택이었다. 장독대며 연못 그리고 예쁜 꽃들로 잘 꾸며 고택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크지도 않은 공간을 잘 배치하여 여러 채가 있어도 답답하지 않았고 주인공 본채를 위하여 자신은 드러내지 않는 조연 역할을 충실히 하여 서로가 상생하며 살았다. 치암 고택에는 유독 글씨를 많이 붙여놓아 뜻은 좋지만 의미가 반감된다. 치암고택과 신독(愼獨), 청풍헌(淸風軒) 정도만 있어도 홀로 부끄러움을 아는 맑은 선비의 바람이 불어 좋으련만…. 마당에 잔디도 정갈한 백토였으면 더욱 담백한 고택의 맛이 날텐데.

퇴계는 낙향해 “진나라 도연명은 굳은 절개의 상징인 소나무와 국화 그리고 대나무를 심어 정원을 만들었다. 그런데 고고한 풍경을 지닌 매화를 왜 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며 절우사 뜰에 소나무, 대나무, 국화와 맑은 향기 지닌 매화와 연못에 연꽃을 심어 이 다섯 친구와 자신을 육우(六友)라 했다. 지금의 장복수 종부의 손맛으로 퇴계를 기리는‘ 육우원 다과’를 개발했다.

 

허술하고 정리 안 된 서러운 독립운동가 향산고택 안채.
허술하고 정리 안 된 서러운 독립운동가 향산고택 안채.

앞에 향산 고택으로 갔다. 대문과 사랑채가 좁게 붙어있어 답답했다. 맞배지붕의 사랑채 뒤에는 ㄷ자 안채가 허술하게 서있다. 발길을 옮길 때마다 옳은 일에 신념을 바치고 독립운동을 하면 이렇게 된다는 산역사의 본보기 같아 마음이 울컥했다. 이집이 어떤 집인가. 향산 이만도는 과거에 급제하여 양산군수 홍문관 교리하다 1896년 예안 의병대장 활동에 1905년 을사늑약파기와 을사오적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 1910년 경술국치 뒤 일제통치를 부정하며 24일 단식 끝에 순국하였고, 아들 기암 이중업(1863~1921)은 파리장서운동 주도했다. 기암의 두 아들 이동흠과 종흠은 대한광복회 활동으로 옥고를 치루었던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문의 고택이 아닌가. 특히 향산의 며느리 김락(1863~1929) 여사의 눈물겨운 굴곡진 삶은 인간으로 느낄 수 있는 온갖 고통을 겪었다. 남편(이중업), 두 아들(동흠, 종흠), 언니 김우락(1854~1933)은 노비 풀어주고 신흥무관학교 세우고 상해임시정부 초대국무령 석주 이상룡의 부인, 친정오빠 백하 김대락(1845~1914)은 자신의 집 ‘백화구려’는 안동지역 애국계몽운동의 학교로 내주고 경술국치이후 67세의 고령에 마을 주민 150명과 서간도로 망명했다. 자신은 3·1만세운동 예안면 시위에 참여했다가 달군 인두로 눈을 지짐 당해 두 눈을 잃었으니 이 모진 수모와 지옥 같은 현실을 어떻게 견디어 내었을까. 온몸으로 나라에 바친 분들이 살았던 고택이 이렇게 방치될 수 있는가. 문중에서 관리하다보니 한계가 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하루빨리 정갈하게 관리하여 후세사람들이 옷깃을 여미는 교육의 장이 되어야 되지 않겠는가.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더니, 독립기념관만 화려하면 뭣하나. 8도 의병대장으로 서대문형무소 첫 순국자였던 구미의 왕산 허위의 장 손자 허경성은 대구서 짜장면 배달해야했고, 임청각의 고성 이씨 석주 이상룡의 손자, 손녀는 해방된 나라에서 고아원에 지내야했다. 김락 부인이 태어난 내앞 마을 ‘백화구려’ 가는 길은 하늘도 슬픈지 안개비 산천을 울리고 있었다. /글·사진= 이재호 기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