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지영 포스텍 산학협력교수·산업경영공학과
곽지영 포스텍 산학협력교수·산업경영공학과

며칠 전이었다. 개강 준비를 마치고 연구실에서 나서는 길, 주차장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캠퍼스를 잠시 거닐었다.

시원한 바람이라도 잠깐 쐬면서 마스크와 ‘사회적 거리두기’의 스트레스를 좀 달래볼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모처럼 햇살이 좋아서 소독이라도 하려는 듯 온몸에 받았다. 하늘과 잔디밭도 푸르게 빛나 눈이 부셨다. 어느 새 봄이 온 모양이었다. 우연히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면 못 알아차릴 뻔했다. 잔디밭을 가로지르는 길이 가르마 같다는 생각이 들자 학창시절 즐겨 외우던 시구가 떠올랐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기분이 좀 풀린 듯한 느낌도 잠시, 기억을 되감아 그 시의 첫 구절을 읊조리고는 이내 울컥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흉포한 바이러스의 침략으로 한 달 넘게 지척의 부모님, 가족들과도 화상통화만 하던 설운 내 마음속으로, 빼앗긴 조국의 들에서 피눈물로 그 시를 썼을 시인의 마음이 훅하고 빨려 들어와, 백년의 시간을 넘어 절묘한 공명을 일으켰다. 새해 들며 슬며시 쳐들어와 저 들을, 거리를 텅 비워버린 바이러스는, 우리에게서 2020년의 첫 두어 달을 ‘순삭’시킨 후 이제 봄까지 빼앗으려 넘보고 있으니, 그 시절 무도한 침략자들과 무엇이 다를까.

옷자락을 흔드는 바람,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는 종다리,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 민들레, 제비꽃, 부드러운 흙….

봄이 온 기쁨을 만끽할 수조차 없었던 시인은 빼앗긴 들에서도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주는 고맙고 따스한 것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푸른 웃음 푸른 설움으로 뒤범벅된 그 심란한 마음을 달랬으리라.

시인의 봄 신령이 옮겨 지폈는지, 평소라면 IT기술과 AI로 코로나와 전쟁에 뛰어든 기업들의 이야기만 찾았을 공학자도 인터넷을 뒤져 불안만 키우는 뉴스들 속에서 사람들이 만들어낸 미담들을 찾아내며 기뻐한다.

전국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의료진들, 보호구 자국을 얼굴에 훈장처럼 새긴 거인 같은 그들의 미소, 개점휴업 중인 식당의 식재료를 소진해 주고 의료진의 식사를 챙겨 보내는 사람들, 침침한 눈으로 손수 마스크를 만들어 이웃과 나누는 어르신들, 앞 다투어 이어지는 기부행렬, 포항의 드라이브 스루 횟집, 이탈리아의 발코니 음악회, 노인을 비롯해 건강에 취약한 이들이 편안하게 생필품을 살 수 있도록 1시간 먼저 문을 열기로 한 착한 상점들….

우리의 그런 노력들이 어우러져 마음까지 얼려버릴 듯한 팬데믹의 시대를 훈훈하게 덥혀 줄 것이다.

그래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의문문은 머지않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왔구나!’라는 감탄문으로 바뀔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