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독일에서 문학의 교황이라 불리는 폴란드태생 유대인 평론가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바 있는 귄터 그라스가 신작 ‘광야’를 발표했을 때, 독일 슈피겔지는 그 책을 쓰레기라며 반으로 찢는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모습을 합성해 표지에 실은 적도 있습니다.

그의 자서전 ‘Mein Leben(나의 인생)’을 필사하고 토론하는 모임을 진행 중입니다. 물론 코로나19 때문에 화상으로 비대면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만.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독일의 베를린에서 성장합니다. 우리로 치면 대학입시에 해당하는 아비투어(Abitur)를 치른 후 어느 날 아침, 집으로 불쑥 찾아온 관리에 의해 제대로 짐을 챙기지도 못한 채 쫓겨나다시피 베를린에서 추방당합니다. 그때 소지품은 손수건 한 장, 작은 가방, 발자크의 소설 한 권.

아직 게토가 만들어지거나, 유대인 학살이 일어나기 전 상태였습니다. 그는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폴란드로 정처 없이 떠나는 기차 안에서 재미없는 발자크 책을 읽으며 무덤덤하게 눈앞에 펼쳐지는 기이한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무일푼에 손수건 한 장, 책 한 권 들고 낯선 국경을 넘지만,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자신이 보이지 않는 짐을 들고 왔음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바로 ‘언어’였습니다. 베를린에서 탐닉하며 빠져들었던 독일 문학, 독일 연극 등이 자신에게 선물해 준 언어라는 선물을 두뇌에 한가득 저장해 보이지 않는 짐으로 운반해 온 것을 깨닫지요. 보이지 않는 이 재산은 결국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를 쓸모있는 유대인으로 만들어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합니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우리 삶도 언제 어떤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릴지 모른다는 불안감 가득한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자산을 구축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는 새벽입니다.

/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