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군자마을

후조당에서 바라본 운암정사와 설월당.

집은 장소와 터가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본래의 장소를 떠난 집은 무미건조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진기한 보물들을 모아놓은 박물관을 ‘명작들의 공동묘지’라 하지 않던가. 오늘 가는 오천문화재단지의 군자마을도 1972년 안동댐 수몰로 광산 김씨 예안파의 중요한 고택 20여 채를 옮겨놓은 곳이다. 같은 수몰지에서 옮겨온 것이라도 농암 종택이 분천마을과 비슷한 상류의 가송리로 옮겼다면 군자마을은 인근 산중턱으로 옮겨와 주위의 자연환경은 볼품 없지만, 집 그 자체에서 풍기는 고택의 향기는 대단하다. 우선 군자마을 주위를 살펴보기 위해 와룡면에서 예안 쪽으로 광산김씨 종택 긍구당을 지나 돌고 돌아 도산서원에서 흘러가는 낙동강을 보면서 이끼마을 선성현문화단지를 둘러 군자마을을 포위하듯이 보고 갔다.

#.안동과 구곡(九曲)문화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성리학은 신성불가침의 국가이념이었고 중심철학이었다. 그 성리학을 집대성한 남송의 주희(주자·1130~1200)는 선비들의 흠모를 넘어 숭모의 대상이고 롤 모델이었다. 주희는 중국 복건성 무이산에서 주자학(성리학)을 성립했고, 주자가 머물렀던 무이정사에서 서원의 모범으로 삼았고, 무이산 계곡에 이름붙인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받아 조선의 사대부들은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구곡을 정하여 자연과 일치되는 이상을 현실에서 실현했다.

경남 고성에는 아예 무이산이 있듯이 주희를 흠모한 회재 이언적(晦齋·1491~1553)도 자신의 호 첫 자를 주희 호 회헌(晦軒)의 첫 자로 삼고 경주 옥산계곡에 4산5대와 9곡을 만들었고, 퇴계 이황(1501~1570)은 도산 구곡을 정하고 도산 12곡을 노래했다.

 

서쪽에서 바라본 군자마을.
서쪽에서 바라본 군자마을.

퇴계도 군자마을에 제자 후조당 김부필(1516~1577)과 탁청정 김유(1491~1555)가 있어 자신이 지은 도산가 “안개와 노을을 집으로 삼고,/ 풍월로 친구삼아/….라고 노래했을 것이고, 분천마을의 농암을 만나서는 배위나 바위에 앉아 먼저가신 농암 이현보를 생각하면서 어부가를 부르며 자신의 4곡 “봄바람 부니 꽃은 산에 가득 피어있고,/ 가을밤에는 달빛이 누대에 가득하니.” 를 읊었을 것이다. 그리고 주희가 무이구곡에서 5곡(탁영)을 ‘산 높고 구름 깊어 숲이 언제나 안개구름에 어둑하다.’노래하며 그곳에 무이정사를 지었듯이 1565년 65세에 낙향한 퇴계도 자신이 지은 도산 12곡에다 도산서당을 마련하고 “오곡이 깊은 산 들어가니 은거하던 선비는 어디 있는고,/ 산 앞에 높은 대(臺)가 있고 대 아래에 물이 흐르는구나./ 그리고 청량산으로 가면서 고산정에서 제자 금난수와 학문을 논하면서 “고인도 나를 보지 못하고/ 나도 고인을 보지 못하니./ 했을 것이고, 청량산 코앞에 와서는 ”청산은 어찌하여 영원히 푸르며/ 흐르는 물은 또 어찌하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가./ 하면서 자신을 자연에 맡기고 다시 담담하게 학문에 몰입했을 것이다.

율곡 이이(1536~1584)도 해주 수양산 석담에 머물면서 무이산 은병봉에서 따온 은병정사를 지어 고산9곡을 정하고 고산가를 불렀다. 공자의 나라 중국을 사모함이 지나쳐 죽을 때 망한 명나라의 ‘만동묘’에 제사지내라 했던 우암 송시열은 속리산 화양계곡에 머물면서 화양구곡을 정한다.

이처럼 온 조선의 강과 계곡에는 100개가 넘는 구곡이 생긴다. 그중 경상도가 55개(51.4%)로 반이 넘고 충북이 22개로(20.56%)를 차지한다. 단일 지역으로는 안동이 10개로 제일 많은 것은 청량산에서 맑은 물이 낙동강으로 흘러오면서 강물은 산을 넘지 못하기에 물줄기가 계곡과 절벽이 부딪쳐 곡(曲)을 만들면서 구곡문화가 생겨난 것이다. 인걸이 자연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인걸을 만들었지만, 그 자연에 의미를 부여하고 감칠 맛나게 살려내는 것은 사람이다. 여기에 성리학으로 무장된 안동선비들은 주로 상류 낙동강 변에 살았던 자연환경이 구곡문화의 이상향을 만들게 했다. 퇴계가 죽을 때 ‘저 매화 분에 물주라’며 그토록 아꼈던 매화가 도산 서당 앞에는 꽃망울 터트리고 앞마당에 왕 버들은 흡사 구곡같이 휘어져 용트림하고 있었다.

 

웅장한 탁청정 정자.
웅장한 탁청정 정자.

#. 명작들의 공동묘지 고택 박물관

1972년 안동댐으로 곡(曲)들 일부는 수몰되어 원래의 기능을 잃었고, 마을도 사라지고 사람도 떠났지만 괜찮은 고택들은 여기저기 옮겨져 있다. 대개의 고택들이 사람이 살지 않아 생동감 없는 녹화방송같이 박제된 모습으로 앉아있다. 원래부터 있던 하회마을이나 양동마을 같이 기와집 초가집이 어우러진 마을이 아니라 문화재 고택들만 옮겨와서 정감 없는 ‘고택들의 야외박물관’ 같은 곳이 군자마을이다. 그러나 고택 하나하나 애정의 눈으로 보고 느끼는 것도 박물관에서 명품을 보듯이 잔잔한 여유와 옛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군자마을을 들어서자 마을을 감싸고 있는 경사진 산에 잡목들을 정리하여 미끈하게 쭉 뻗은 소나무들이 사람 하나 없어도 생기를 불어넣어 고택들이 한결 돋보였다. 혼자서 마음껏 눈과 마음을 호사했다. 임진왜란 때 영남의병대장으로 순국한 근시재 김해(1555~1593) 선생의 숭고한 비를 보고 왼쪽 산위에서 전체를 조망하고 내려와 군자마을 입향조 후조당 김부필(1516~1577)의 종택에 딸린 별당 후조당으로 갔다. ‘ㄱ’자집으로 흐트러짐 없는 단단한 격을 품고 있었다. 남부지방의 개방형이 아니라 기둥과 기둥모두를 여름이면 들어 올리는 합각문으로 꽁꽁 싸매어 답답해 보였으나 추운 안동지방의 자구책이다.

대청마루에 퇴계가 제자에게 써준 ‘후조당’ 편액은 멋 부리지 않는 퇴계의 정직 담백한 글씨가 외롭게 걸려있다. 그 옆에는 정면 6칸의 단정한 누각형식의‘운암정사’가 붉은 매화와 봄의 향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붙어있는 설월당 정자도 4칸 누각형식으로 단정한 낭만을 드러내고 그 앞에는 아직 피지 못한 자목련이 매화에 질세라 검붉은 자색 꽃을 살며시 밀어내고 있었다, 마치 금붕어가 알을 낳듯 몽우리 진 수많은 자목련이 봄 햇살에 엷은 미소 머금고 속삭이듯 나오고 있었다. 하염없이 자목련이 다 필 때까지 옆에서 기다리고 싶었으나 이성의 발걸음은 파청정 정자로 향하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고택들을 돈보다 정신을 추구하는 광산김씨 문중의 힘으로 옮겼다니 대단한 일이다.

웅장한 탁청정과 낭만의 낙운정 정자.
웅장한 탁청정과 낭만의 낙운정 정자.

#. 힘과 멋이 어우러진 탁청정과 낭만의 낙운정

잘난 사람들만 다 모아놓아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가 있듯이 여기도 광산김씨 문중의 내노라 하는 고택들을 옮겨 놓았지만 군자마을의 스타는 탁청정과 김유이다.

탁청정은 김유(1491~1555)의 호에서 따온 이름인데 멱라수에 빠져죽은 비운의 충신 초나라 굴원(BC343~BC223)의 어부사 중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에서 따왔고, 정자치고는 엄청 크다. 종이 웅장하면 맑기 어렵고, 맑으면 웅장하기 어려운데 이 정자는 웅장하면서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격이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 한옥도 하나의 로망으로 전국에 수없이 짓고 있는데 규모만 크고 멋도 울림도 없는 것은 안목 없는 졸부들의 천박한 과시용 때문이다. 그래서 신은 공평하여 안목 있으면 돈이 없고 돈 있으면 안목 없는 것이다. 퇴계나 남명이 기거한 도산서당이나 산청의 산천재를 보라. 대유학자들도 최소한의 공간으로 소박하면서 절제의 미를 품어내지 않던가. 건물 특히 정자는 주인의 철학과 안목, 인품이 스며있기에 결국 주인이 누구냐가 중요한 포인터가 된다. 원래 정자는 자연 속에 있는 듯 없는듯해야지 크면 자연과 분리되는데 이 탁청정은 크면서도 드라마틱한 장쾌한 미를 발산한다. 정자에 올랐다. 규모도 그렇지만 조선의 최고급 소나무들로 마음껏 멋을 부렸다. 김유 사후에 명필 석봉 한호(1543~1605)의 힘 있고 옹골차게 쓴 ‘탁청정’은 정자에 어울리는 화룡점정을 찍는다.

그러면 이 정자의 주인 김유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이토록 큰 정자와 옆에 있는 큰 살림집을 지을 수 있었을까. 보통의 선비들이 그러하듯 과거보아 입신양명하는 것이 최고의 원하는 코스였다. 김유는 생원시에는 합격했지만 계속 낙방하여 과거를 단념하고 형님을 대신하여 부모님 봉양하면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낭만적인 삶으로 방향을 바꾼다. 고모가 남긴 유산으로 경제적 고민 없이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런 경제적 복을 사람접대와 1541년(51세)에 고래 등 같은 정면 6칸의 안채와 이런 멋진 정자를 지었다. 지금이야 먹방이 대세이고 남자 셰프들의 전성기지만 김유는 600여 년 전에 전통요리책 ‘수운잡방’을 지었다. 121가지 요리를 소개하는데 주로 술 담는 법 61항목, 김치가 17항목이다.

 

탁청정에 있는 한석봉 글씨. 진품은 박물관에 있음.
탁청정에 있는 한석봉 글씨. 진품은 박물관에 있음.

집의 당호를 보면 주인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알 수 있듯이 ‘수운잡방(需雲雜方)’은‘역경’에 “구름 위 하늘 음식과 주연으로 군자를 대접한다(雲上于天需君子以飮食宴樂)”에서 따온 것으로 의미하는 바가 크다. 경제력에다 벼슬하지 않아 집 짓는데 올인 할 수 있었다. 마음껏 멋 부린 격조 있는 명품 정자를 지었던 김유는 행복은 부와 명승보다 좋은 관계에서 온다는 것을 웅변으로 보여준다. 탁청정이 근엄하고 권위적인 본부인이라면, 탁청정 아래 낙운정(落雲亭)은 수줍은 듯 낭만이 흘러 아름다움은 다 갖추었으면서도 말없는 첩 같아 연민의 정이 흐른다. /글·사진= 이재호 기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