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연사의 350년 수령의 보리수나무와 비로전. 각연사는 충북 괴산군 칠성면 각연길 451에 위치해 있다.

신라 법흥왕 2년(515년) 유일 스님이 창건하였다는 각연사. 창건설화에 의하면 유일 스님이 사찰을 짓기 위해 칠성면 사동 근처에 절을 지으려고 공사를 시작하는데, 자고 일어나면 목재를 다듬은 대패밥이 남아 있질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스님이 밤잠을 자지 않고 지켜보니 까치들이 몰려와 대패밥을 하나씩 물고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이었다. 따라가 보니 까치들은 산 너머 못에 대패밥을 떨어뜨려 메우고 있었다. 그 못에서 이상한 광채가 솟아 들여다보니 석불 한 기가 들어 있었다.

스님은 못 있는 데로 절을 옮겨 짓고 못에서 나온 석불을 모신 후 ‘깨달음이 연못 속의 부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覺有佛於淵)’라는 뜻에서 절 이름을 각연사(覺淵寺)로 지었다. 비로전에 모셔진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못에 있던 그 석불이다. 그 뒤 이 불상에 지성으로 기도하면 영험함을 얻는다 하여 참배자들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산봉우리에 둘러 싸여 아늑하게 자리한 각연사는 고려 초 통일 대사가 중창하여 대찰이 되었으며 조선시대와 근래에도 여려 차례 중수되었다. 유서 깊은 사찰 치고는 규모가 크지 않다. 절은 텅 빈 듯 고요하다. 사회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절은 햇살에 감금된 것처럼 적요만 감돈다. 들어서는 나를 지켜보는 눈이 있는 것 같다. 아담한 전각들이 단을 달리하며 침묵에 싸여 있을 뿐이다.

지루한 삶의 고갯길을 넘어가듯 깨끗하게 비질이 된 마당 앞에서 나는 잠시 숨을 고른다. 대웅전 법당에서 예를 갖춰 보지만 마당 한켠에 있는 감로수도 외로워 보이고 살짝 모습을 드러낸 비로전의 왼쪽 어깨도 시려 보인다. 비로전 앞 커다란 보리수나무 한 그루가 기도하듯 서 있다. 350년이라는 세월동안 비로전이 나무를 토닥이고 보리수나무 긴 그림자가 마당을 내려와 비로전의 굴곡진 심장소리를 들었으리라. 둘은 분명 오랫동안 하나였다.

인적이 없는 절간에서는 모든 것이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살집이 갈라진 늙은 비로전 기둥에서 온갖 맑음과 궂음의 순간들이 읽혀진다. 거칠고 척박한 세월을 인고의 힘으로 거너온 조상들의 숨결 같기도 하고, 세상을 등지고 무욕으로 나를 다스리는 고독한 스님의 절제된 모습 같기도 하다. 서늘함이 느껴지는 법당은 너무 고요해서 애잔하다.

비로전 안을 지키는 석조비로자나불상은 보물 제 433호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불상과는 달리 크지가 않고 단아하다. 자그마한 체구와 빨갛게 칠한 입술, 왼손 집게손가락을 앙증스럽게 감아쥔 지권인, 삼존의 화불이 섬세히 새겨진 광배까지,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무언지 모를 편안함이 나를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문이 닫혀 있는 법당 안은 과거의 세계로 초대받아 온 느낌이다.

높은 봉우리를 끼고 계곡 길을 하염없이 달려서 찾아온 이 곳, 길은 가파르지 않고 평탄했지만 인가에서 멀어지는 동안 무수한 삶의 갈기들을 떠올렸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공양거리를 머리에 이고 걸어서 찾아왔을 가난한 불자들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안온한 절의 풍경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며, 옛 불자들의 불심이 굽은 나무처럼 자꾸만 따라 왔다.

각연사 오는 길은 결코 험난하지 않은데 왜 이토록 인간사가 짠해 오는 걸까. 언젠가 전생에서 홀로 걸었을 지도 모를, 처음 오지만 수많은 애환과 시름이 숨 쉬는 생명력 느껴지는 길의 근육을 보고 말았다. ‘언덕을 따라 올라가는 길을 역동적으로 추체험해 보면 길 자체에도 근육이 있고 반(反) 근육이 있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가스통 바슐라르의 말처럼.

조낭희 수필가
조낭희 수필가

대부분 사찰로 이어지는 길은 삶과 실존에 대한 몸부림으로 얼룩져 있으리라. 그 옛날 여인들의 애환이 화석처럼 살아 있을 길을 언젠가 조용히 걸어보고 싶다. 한때 여성 불자들의 기복신앙을 못마땅하게 여긴 적이 있다. 자식의 대학입시나 남편의 승진, 사업 번창을 위한 일시적인 기도는 지나치게 가족 이기주의적인 행위로 비쳤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구하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우거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용맹정진하며 차원 높은 선의 경지로 몰입하는 자세가 불교의 가장 큰 매력이라 여겼다. 하지만 사찰에서 육신의 고통을 불태우며 철야기도를 하는 여인들을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오로지 가족을 위해 자기를 내려놓은 채 불심으로 가족의 건강과 평화를 세우고 공덕을 회향하는 모습은 묵직한 울림을 안겨줬다. 시대가 열악하고 그늘진 환경에서 살아가는 여인일수록 마음의 의지처가 필요했으리라. 여인들의 고달픔과 지난함이 살아 숨 쉬는 길, 산사 가는 길은 길고 질긴 삶의 이랑이다. 무수한 이타행으로 공덕을 쌓은 위대한 인물들도 이런 헌신의 마음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았을까? 승용차에 몸을 싣고 풍경을 감상하며 안일하게 무언가를 구하러 달려온 내 육신의 호사스러움이 잠시 부끄럽다.

창호지 위로 비치는 햇살이 은은히 기웃대고 비로자나부처님의 눈길도 한결 더 친근해졌다. 수천 년의 기억을 헤매다 실낱같은 인연을 찾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천천히 백팔 배를 시작한다. 옛 여인들이 그래왔듯 출렁이는 마음 모두 내려놓고, 내 안에 숨겨져 있는 희미한 길을 찾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