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
박화진영남대 객원교수·전 경북지방경찰청장

봄이 성큼 다가왔다. 코로나19도 봄을 이기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벚꽃, 개나리 꽃망울들이 봄의 전령사를 자처한 듯 꿈틀거리더니 어느새 만개하고 있다.

연푸른 나뭇잎 사이로 새색시 볼 같이 피어오르는 분홍 빛깔에 쑥스럽게도 중년의 가슴이 살며시 설렌다. 병아리 속 털 같은 노란빛 꽃들을 보노라면 코로나19 시름마저 잊게 해준다. 머지않아 형형색색의 꽃 잔치가 펼쳐질 것 같다.

사회적 거리두기 같은 심리적 고립감을 동네 주변 봄꽃들을 보면서 탈출해봄직하다. 봄가을 꽃이나 낙엽의 색깔을 보고 있노라면 어떻게 저런 고운 색깔을 내는지 궁금해진다.

사람이 보고 느끼는 색깔은 물질이 가진 근원에 굴절된 빛이 시신경을 통해 뇌가 인식하는 구조라고 한다. 그렇게 인식되는 색들은 자연에서 내뿜는 본연의 색은 아닐 것이다.

어떤 뛰어난 화가도 자연의 천연색을 담지 못한다고 한다.

인상파 화가들도 자연의 색을 담지 못한 한계에 부딪쳐 새로운 색과 빛을 창출한 것 아닐까 싶다. 자연의 위대함에 경외감이 들게 된다. 하지만 색깔에 이념이 채색되고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수함이 퇴색되는 시대가 된 것 같다. 색이 원치 않는 편 가르기에 동원되었다. 열정과 사랑의 상징이었던 붉은색은 공산주의자의 피의 혁명을 상징했다. 자유진영에서 거부감을 가진 적이 있다.

이를 꼬집고 이야기하면 색깔논쟁으로 비화된다. 희망과 따뜻함을 나타내던 노란색이 진보의 가치를 내세우던 정당의 상징색이 된 적이 있다. 보수진영으로부터 반감을 갖는 색으로 된 인식의 변질도 있었다.

오랫동안 보수성향 정당이 누리던 파란색이 진보성향 정당의 상징색으로 채택되는 아이러니도 경험하고 보니 색에 덧칠해진 이념은 고착되는 것은 아닌가보다. 색깔을 통한 소속과 정체성 알리기가 더욱 가열되고 있다.

경선에서 탈락하고도 무소속 출마를 강행하는 후보자는 이전 소속 정당 색의 근사치 색으로 덧칠한다. 정체성이 완전히 다르지 않다는 것을 역설한다. 색(?)들의 전쟁이다. 그래서 선거철에는 자리에 따라 옷차림조차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속칭 ‘깔맞춤’(색깔맞춤)을 해야 한다. 남자들은 넥타이 색깔 고르기까지 신경을 써야한다고 하니 씁쓸한 기분이 든다. 색의 상징화가 권력투쟁의 치열한 도구가 되었다. 색으로 이념을 세뇌시킨다.

자연이 준 순수한 아름다움에 취할 행복감을 박탈하는 결함을 가진다. 색으로 편 가르기 하는데 휘둘려 봄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말아야겠다. 코로나19로 거리의 색이 변하고 있다. 현란한 채색의 도심이든 시골의 한적한 동네든 사람이 있는 곳에는 직사각형 작은 흰색이 움직이고 있다.

순결과 청결을 상징하는 흰색이다. 중환자들이 감염되지 않기 위해 착용하던 마스크를 많은 사람들이 착용하고 다니는 모습. 온통 중환자들이 거리를 다니는 것 같다. 흰색에 대한 혐오증을 불러일으킬까 걱정된다.

우울감이 더해간다. 고생하는 흰색에게 순결과 청결의 고귀함을 빨리 찾아주고 싶다. 마스크 앞면에 스마일 표시라도 해서 오가는 사람들이 ‘씨익’ 눈웃음이라도 나누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