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농암 종택

강물과 절벽이 어우러진 고산정.

집을 옮긴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못으로 박지 않고 끼우거나 짜 맞춘 한옥들은 가능하다. 벽은 허물고 기와부터 나무하나하나 빼어서 레고 쌓듯이 역으로 조립하면 본래의 집이 된다. 예전에도 간간히 옮겨지었지만 6~70년대 공업화 산업화로 공단이 들어서거나 댐으로 마을이 없어지거나 수몰되면서 괜찮은 고택들을 대규모로 여기저기 옮겨지었다. 지금이야 건축가가 집을 설계하고 짓지만 예전에는 집주인이 건축가고 설계자이기에 주인의 생활철학과 가치관이 녹여나기에 결국 집은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격이 달라진다. 옮겨지은 고택이라도 원래의 장소보다 더 좋은 고택이거나 흠모할 수 있는 향기 나는 주인이거나 가슴 찡한 사연이 있거나 고택 자체에서 풍겨 나오는 아름다움이 흐르는 전국의 옮겨온 고택들을 관념으로 쓰지 않고 매주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서 살아 있는 글을 전할 것이다.

#. 그리운 듯 찾아가는 농암 종택 가는 길

소리도 없이 수줍게 피어버린 앵두꽃을 뒤로하고 길을 나섰다. 내비는 경주 수오재 집에서 안동 농암 종택 177Km를 가리킨다. 봄이 오면 언제나 희망을 갖지만 세상사 곡절이 많아 항상 봄은 왔지만 자신에게는 봄이 오지 않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었는데 올봄은 코로나19 때문에 전 세계가 춘래불사춘이다. 안동 시내 강변을 지나자 도심도 협소한 골짜기에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있고 아파트와 학교가 앞 뒤 산에 막혀 겨우 숨 쉬고 있는듯해 안쓰러웠다. 그러나 안동 들러오는 남쪽과 북쪽으로 나갈 때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는 큰 글씨의 관문이 안동의 대표적인 문중들의 집들이 크고 웅장한 솟을대문과 연상된다. 원래 권위의 상징인 솟을대문은 안동양반들은 스스로 존대한 연유도 있고, 경주 양동마을의 기와집이 유독 큰 것은 청백리 우재 손중돈으로 대표되는 월성 손씨와 회재 이언적으로 대표되는 여강 이씨 문중의 경쟁의식이었듯이, 안동도 농암 이현보의 영천 이씨, 퇴계 이황의 진성이씨, 학봉 김성일의 의성김씨. 서애 류성룡의 풍산 류씨 등도 이런 연유일 것이다.

 

내려다본 농암 종택.
내려다본 농암 종택.

북쪽으로 접어들자 온통 산으로 굽이져 마을을 이루지 못하고 띄엄띄엄 집들이 협소한 산비탈 밭에 의지하고 산다. 억척같이 일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조건이다. 그래서 안동여인들이 안동포의 한 올 한 올 만큼 강하고, 남자들은 외모는 순해보여도 안동소주만큼 강한 고집이 생겼을 것이다. 서러운 조건에 참고,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며 인내하는 속 깊은 안동사람이 될 수밖에 없구나 생각이 스치는데 곧바로 ‘속 깊은 고구마’ 큰 입간판이 나타난다.

도산서원을 지나고 점점 깊어가는 산세는 봉화 청량산이 아스라하게 보이고 길은 굽이굽이 돌다 청량산이 성큼 다가왔을 때 농암 종택 가는 가송리로 접어들었다. 상류강변치고는 제법 너른 밭과 여러 집들이 보인다. 올 때 마다 감탄했던 수직으로 내리뻗은 절벽이 언제나처럼 서있다. 바위 끝의 고산정(孤山亭)은 푸르고 맑은 소리 내며 흘러가는 물을 보며 절묘하게 앉아 있다. 고산정과 절벽은 서로 놓아두면서 함께하는 묘한 조화를 이룬다. 마치 고산정을 지었던 성재 금난수(1530~1604)가 퇴계 이황(1501~1570)의 제자 되기를 한 달이나 매일 찾아가 제자 되었듯이 절벽이 퇴계 같고 고산정이 금난수 같다. 고산정은 결코 외로운 산이 아니었구나, 마치 정자 앞에 소나무 한 그루가 외롭지 않게 비스듬히 서있다. 미인과 소나무는 혼자 있을 때가 더욱 빛난다.

 

농암 종택 솟을대문.
농암 종택 솟을대문.

#. 농암 종택을 입체적으로 보는 방법

사람이나 사물이나 어느 한 시각에서 보면 진면목을 모를 수 있다. 특히 고택들은 주위를 감싸고 있는 자연환경이 그 고택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한눈에 보려면 위에서 보는 부감법을 활용한다. 일명 헬기, 드론기법이다. 그러나 사람의 눈으로 보아야 한옥의 살아 숨 쉬는 생경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농암 종택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은 강 건너 절벽 바위 위를 가기 위해 강건너 선비 길로 접어들어 절벽을 오르락내리락 선비 다람쥐 되어 걸었다. 산길 약 3Km를 가니 옮겨놓은 농암 종택이 한눈에 보고, 다시 되돌아와 강 건너 농암 종택에서 시심(詩心)의 길을 걸었다. 흐르는 물소리, 불어오는 바람소리, 숲 속의 새 소리가 나에게는 시였고 음악이었다. 사유지라 더 이상 갈 수 없는 강가에는 제법 넓은 너럭바위가 누워있고 그 위에 어미와 새끼 공룡 발자국이 강물 흐르는 남쪽으로 나있다. 지구역사 45억 년 중 거대한 공룡은 여기처럼 발자국과 뼈와 알만 남기고 1억5천만년 존재하고 완전히 사라졌다. 우리 인간은 겨우 3만년 존재하고 있는데 개발과 발전이란 논리로 지구를 못살게 파괴하여 온갖 재앙이 소리 없이 밀려온다. 여기 흐르는 강물도 이처럼 맑아도 하회 예천을 지나 구미 대구쯤 가면 낙동강 푸른 물은 어디로 가고 악취가 나고 하구인 부산쯤 가면 썩은 물인데 어찌할 것인가? 필자가 90년대 초 울산, 경주, 영천, 등지에 수많은 공룡발자국을 발견해 놓았는데 공룡 발자국은 단단한 화강암 아닌 진흙이 굳어서 바위가 된 여기처럼 이암(泥巖)에 찍힌다. 그래서 암각화를 새긴 울산 태화강변의 반구대 암각화나 천전리, 고령 양전동 알터 암각화 새긴 바위가 이암인 것이다.
 

긍구당 아래서 소나무 이식 감독하는 이성원 종손.
긍구당 아래서 소나무 이식 감독하는 이성원 종손.

#. 옮겨온 농암 종택을 거닐며

농암 종택은 살림집만 옮겨 온 것이 아니라 문중의 주인공 농암 이현보를 배향하는 분강서원과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종가 집들을 옮겨놓아 규모가 크고, 적당히 흩어지게 잘 배치하여 놓았다. 입구 솟을대문이 위압적으로 버티고 있다. 지금 사람 눈에도 위압적인데 양반 상놈 신분으로 사람을 높이고 깔 볼 때 이런 대문 앞에 서면 죄지은 사람이 대검찰청에 들어가는 심정일 것이다. 이 집에서 가장 낭만적인 긍구당(肯構堂)이 고택다운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멋을 감추면서 쓴 글씨도 예술이고 건물 배치도 누각형식으로 한옥의 절대적 미감을 살렸다. 이 긍구당은 1370년경 농암의 고조부 이현이 지은 650년쯤 되는 고택이다. 특히 농암이 이 집에서 태어나고 이 집에서 돌아가셨던 농암의 시작과 끝이 된 집이다. 긍구당 측면에서 사진 찍다 난간 아래를 보니 농암의 17대손 이성원 주인장이 소나무 옮겨 심을 위치를 선정해주고 있었다. 끝나기를 기다려 인사드리고 몇 마디 주고받았다. 대문 들어오는 들머리에 모여 있던 존재 없던 소나무들을 이렇게 옮겨놓으니 소나무가 살아나 좋다면서 저 앞산 너머 묘소에 누워계시는 ‘농암 할배’가 기뻐하실 것이라 했다. 종택 입구 아래부터 처음 백사장이 시작되고 절벽이 위치해 참 잘 정하셨다하니 수몰된 분천 고향마을과 여기가 흡사하다 하신다. 비록 문중과 선조지킴이었지만 개인의 집념이 이렇게 고택 살리는 대단한 일을 하셨다. 지금이야 여러 문중에서 고택체험숙소로 활성화 되었지만 종택으로는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개방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고택의 향기를 함께 느끼고 가니 문중을 넘어 사회로 확산한 것이다. 두루마기 벗어두고 작업복에 일 감독하듯 예전에 하인과 종들이 하던 역할을 지금의 고택주인들은 풀 뽑고, 마당 쓸고, 돌쇠, 마당쇠 되어야 고택이 살아난다.

#. 선비의 이상향 농암 이현보와 애일당

애일당(愛日堂)은 농암이 날을 아껴 효도하겠다는 뜻으로 아버지를 위해 지어주고 귀천, 지위고하, 남녀에 차별을 두지 않고 효를 실천한 의미 깊은 곳이다. 1519년 67세의 농암은 이곳에서 아버지를 포함한 아홉 노인을 모시고 색동옷입고 춤을 추어 즐겁게 해드렸다. 이 가풍을 이어받아 둘째아들 이문량이 1547년부터(농암 81세) 1902년까지 구로회는 400여 년간 이어진 대단한 행사다.

2012년 애일당 건립 500주년을 맞아 안동지역노인 300명을 초청해 뜻 깊은 구로회를 다시 열었다. 농암 자신이 89세(1467~1555)까지 살았고 농암의 증조부 76세, 고조부 84세, 아버지 98세, 어머니 85세, 숙부 99세, 조부 84세, 조모 44세, 외조부 93세, 외숙부 두 분 93세, 73세, 동생들 91세, 86세이니 조선중기 당시 평균수명이 40인데 200년 동안 평균 80이었으니 친가, 외가 대단한 장수 집안이다.

아마도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최고의 장수가문일 것이다. 그 농암이 애일당 앞 강가에서 “깊은 밤 난간에 의지하여 잠은 오지 않는데./달빛에 산 그림자 강에 기울이고….” 라고 읊으며 산 덕분일 것이다.

조선시대 농암만큼 복된 삶을 산 사람은 없을 것이다. 권력도 형조참판으로 76세까지 적당한 벼슬을 했고 틈틈이 이웃 안동부사, 밀양부사 경주 부윤 등 8고을의 수장을 맡아 틈틈이 부모를 즐겁게 해드렸고, 말년 14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실천하여 달밤에 배 띄워 흥취에 어부가를 부르고, 집안 모두 장수하는 천복을 누리고 살았던 적선의 흔적이 농암 종택이다. /이재호 기행작가


※ 기행작가 이재호는 우리문화를 알리고 지키며 1995년부터 경주에 정착해 사라져가는 고택 13채를 옮겨와 5채를 지은 수오재에서 살고 있다.

동국대에서 한국미술사를 강의했고 ‘천년고도를 걷는 즐거움’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 ‘왕의 길을 걷는 즐거움’ 등의 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