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숙 생각학교ASK 연구원·프리랜서
정은숙
생각학교ASK 연구원·프리랜서

이른 아침, 비 내리는 수목원을 걸었다. 궂은 날씨에도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코로나19 사태로 힘겨운 대구에서 살아가는 소시민이 누리는 작은 위안이다. 틀어박혀 살아야만 하는 요즘, 산책 한 번도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깨닫는다.

얼마 만에 돌아온 주부의 삶인지 모르겠다. 남편 출근시키고, 설거지하고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신 후 모닝 요가로 긴장을 푼다. 시계가 아침 아홉 시를 가리키면 수목원, 화원동산, 수변공원을 요일마다 번갈아 가며 산책한다. 이렇게 바뀐 일상은 낯설지만, 짙은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운 도시에서 일상의 자그마한 행복을 한 조각 선물해 준다.

사람들의 삶은 멀리서 보면 대략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개인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분리해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주만큼 복잡하고 다양한 사연과 이유를 갖고 살아간다. ‘수많은 인생들은 과연 자신의 삶에 스스로 얼마나 만족하며 살아갈까?’ 대부분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불평불만에 젖어 막연히 저 멀리 어딘가 감추어진 행복을 추구하지 않을까?

근래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예기치 못하게 덮친 코로나19로 인해 일상이 붕괴되고 삶이 위협받는 상황에 대한 불안감이 클 것이다. 불안감 속에 자가격리나 스스로 절제하며 대면 접촉을 기피하는 현재 상황에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진다. 집단 속에서 받던 스트레스가 이제는 일상에 대한 절실한 욕구로 옮겨졌다. 나도 그랬다.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며칠은 마치 휴가를 얻은 것처럼 좋았지만 사태가 장기화되고 격리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익숙했던 과거를 갈망하는 나를 발견하는 중이다.

아침이 밝으면 출근하고, 저녁 어둠이 깃들면 퇴근길에 동료들과 술자리를 갖거나 가족과 저녁식사를 하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그 일상이 지고한 만족감을 주는 시간이기 때문은 아니다. 손에 붙잡을 수 없는 금지된 일상이기에 어쩌면 욕구가 강렬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보다 더 큰 위기를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이런 불편한 현실쯤은 기꺼이 받아들이자고 스스로 다독인다.

전쟁처럼 바뀐 요즘, 일상의 두려움을 행복으로 전환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있다면 ‘자세히 보기’다. 예전까지는 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기에도 바빴던 일상이라 무심하게 지나치고 자세히 시선을 주지 못한 것들, 듣지 못하던 소리를 듣는 일에 집중해 보는 거다. 갑자기 늘어난 산책 시간은 내게 그렇게 ‘자세히 보기’가 주는 일상의 행복을 발견하게 해 주었다.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들의 아름다움을.

가냘프게 매달린 앙상한 가지에 조금씩 물이 차오르는 모습, 메마른 땅속에서 존재조차 몰랐던 야생화가 움트는 생명력, 소리 없이 피어나는 봄꽃들을 보며 활기를 얻는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계절은 고요하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고개를 내미는 봄꽃으로부터 위대함과 침착함을 배운다. 그들의 조화로움을 배운다. 나름의 색깔과 다채로움으로 봄이 탄생하듯 사람 또한 각양 색깔과 가치관들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다. 조화롭지 못한 일이 생기는 건 무언가 순리를 역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도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왔다. 이겨내야 한다.

고통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삶’을 반성하게 해 준다. ‘평범함’에 대한 감사를 회복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일에 대한 감사, 내 곁에 가까이 있는 사람에 대한 감사, 더불어 함께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는 반성, 집 안 구석구석 내 손길이 필요함을 깨닫는 시간이다. 매일 집안 일정한 공간을 지정해 정리정돈을 시도해 보고, 시간이 없어 하지 못했던 일을 기억을 떠올려 누려보는 일, 때로는 멍 때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멈춰 보는 것, 비 오는 공원을 걸으며 구석구석 야생화를 찾아보는 작은 실천이 지친 우리에게 또 다른 행복을 발견하게 해 줄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옛 왕의 반지에 새겨진 문구처럼, 지금의 힘든 시간은 언젠가 좋은 기억으로 그리움이 될지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지금 ‘자세히 보기’를 통해 행복을 되찾는 일.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닐까?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