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긍정의 에너지로…

우암·다산 사적비 제막식을 마치고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진태수, 김옥출, 김창길, 김광수, 이상준. 2004년 6월19일.

유구한 세월 속에서 어느 한 시점의 손길과 숨결을 느껴보는 것은 참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조선시대 형벌 중에서 ‘유3천리’ 형을 받아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던 220여 명 중 굵직한 사건 34개를 추려내어 그들이 이곳까지 와야만 했던 사연과 남긴 흔적들을 살펴보는 일은 더욱 그랬다. 이는 그동안 어느 누구도 다루지 않았던 생소한 내용들이었기에 나름 사료들을 찾는 데는 애를 먹었다. 하지만 이 어려운 작업은 과거와 교감하는 일이었으며, 나아가 과거를 살았던 사람들과 교감하는 일이었기에 내내 행복했다.

영의정을 지낸 퇴우당 김수흥처럼 이곳에서 객사한 유배인도 있었고, 충신 박팽년의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 이시애의 난에 연루된 사람들의 가족들처럼 끝까지 복권되지 않아 지역민으로 살다가 한과 애환을 품은 채 죽어간 사람들의 애환도 다루었다.

다산과 우암 같은 석학들이 있었는가 하면 지방 차별과 조정의 부패에 항거하여 일으킨 농민 항쟁에 희생되어 온 사람들, 그리고 ‘정감록’의 예언을 토대로 유토피아를 꿈꾸며 왕권과 지배계층의 부조리에 저항하다가 여기까지 흘러온 사람들의 레퍼토리도 있었다.

이들의 사연들을 엮어나가다 보니 어느새 파란만장했던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가 꿰뚫어졌다.

글을 써내려가는 동안 유배라는 것은 억울하면서도 가혹한 형벌이었다는 부정적인 생각도 들었지만, 그 내면에는 긍정적인 부분이 더 많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 유배는 오히려 선비들에게 염치와 명분의 상징이었고, 때로는 자기완성의 공간이었으며 자기성찰의 기회이기도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가고 없지만, 그들이 지나간 ‘경상도 장기(長鬐)’라는 그 자리에는 역사와 효충(孝忠)과 예가 면면(綿綿)히 흐르고 있었다. ‘귀양지’라는 부정적인 면 보다는 학문을 숭상하고 염치를 아는 사람들이 그 유·무형의 문화유산들을 고즈넉하게 간직하며 긍정의 에너지로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학술대회. ‘포항 장기현과 우암 송시열’이란 주제로 2007년 11월14일 오후 2시 포항시청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학술대회. ‘포항 장기현과 우암 송시열’이란 주제로 2007년 11월14일 오후 2시 포항시청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그 좋은 예가 2001년 12월 22일 장기초등학교 교정에 나란히 세워진 우암과 다산의 사적비였다.

이 비들의 건립은 ‘장기발전연구회’의 노력과 뜻있는 지역 인사들이 앞장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장기발전연구회는 낙후된 장기(長鬐)의 발전을 염원하는 뜻있는 인사들의 모임체였다. 그 구성원들은 교수, 교사, 사업가, 회사원, 공무원, 농·어업인 등 다양했다. 매년 장기지역의 역사, 문화, 예술, 민속, 산업 및 기타 분야에 대한 조사 연구와 교육을 해온 자생단체였다.

이들의 주선으로 2001년 12월 22일, 다산과 우암 두 집안의 후손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적비 제막(除幕)식이 거행되었다.

다산 측에서는 법무부장관을 지낸 정해창씨가 집안사람 수십 명을 데리고 왔고, 우암 측에서도 송월술 외 여러분의 자손들이 참석하였다. 비석의 주인공들은 살아서는 결코 나란히 서지 못할 노론과 남인의 대표자였겠지만,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서 와서 어느 사람의 학문은 옳았고, 누구의 학문은 돼먹지 않았다고 평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날 두 가문의 후손들은 각자 선조들이 유배를 왔던 이 자리에서 화합의 악수를 나눴다.

장기에 독특한 흔적을 남긴 사람들에 대한 유허비도 건립했다.

2008년 11월 22일, 영의정으로 있다가 기사환국 때 이곳에 유배를 와 죽은 퇴우당 김수흥 선생 유적비를 건립했다. 멀리서 퇴우당의 후손들이 참석하여 이곳사람들의 성의에 감사해 했다.

회재 이언적 선생의 흔적을 찾아 그가 남긴 시를 적어 현장에 시비(詩碑)를 건립했을 때는 여강이씨 문중에서 감사패를 갖고 와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장기충효관도 지었다. 장기사람들이 민간자본 보조금을 받아 2004년 6월 19일 개관 하였다.

운영비는 순전히 장기발전연구회와 지역 유지들의 협찬금으로 충당하다가 건물과 부지 일체를 포항시에 기부 체납했다.

이곳에는 장기 출신 의병장, 장군, 애국지사, 예술가들의 사료뿐만 아니라 장기지역에서 출토된 유물, 그리고 각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던 각종 고서류 등이 전시되어 있다. 소강당에서는 얼마 전까지도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사자소학, 명심보감, 한글·한문서예, 경전강독 등을 교육했다.

역사책의 발간과 학술대회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2006년 12월 1일에 발행된 ‘장기고을 장기사람 이야기’는 장기지역의 향토사를 총 망라한 것이었다. 전국 읍·면 단위에서 이 정도 수준의 역사책을 발간하는 것은 보기 드물다는 전문가들의 혹평도 있었다.

2007년 11월 14일, 포항시청 대회의실에서 ‘포항 장기현과 우암 송시열’이란 주제로 개최한 학술대회에는 정주영, 이민홍, 이종길, 김윤규, 배용일 등 장장한 석학들이 나와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애국지사들의 추모비 건립은 더 의미가 있다.

장헌문은 구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은 지역출신 애국지사다. 출소 후 광복이 되기도 전에 사망하였고, 직계 유족들조차도 일제의 등살에 시달리다가 만주로 피신했다. 이후로 직계후손들의 생사조차 확인할 방법이 없었음인지 그의 공적은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다. 점차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던 그의 행적들을 애석히 여긴 장기사람들이 지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나섰다.

후세의 본보기로 삼기 위해 장기초등학교 교정에 번듯하게 추모비를 세운 것이다. 201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일이다.

 

충효관 개관에 맞추어 김병관 고문이 자비로 제작하여 기증한 ‘충효세전비’ 제막 모습. 2004년 5월26일.
충효관 개관에 맞추어 김병관 고문이 자비로 제작하여 기증한 ‘충효세전비’ 제막 모습. 2004년 5월26일.

지역 출신 엄주동 선생도 항일투사로 유명하다. 장기면 임중리 출생인 그는 1916년 대종교 창시자인 나철(羅喆)과 같이 활동하다가 나철 선생이 구월산에서 일제의 폭정에 항거하여 자결한 뒤에는 만주로 건너가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총재인 서일(徐一)의 연락책으로 활약하였다. 청산리 전투에도 참여하였고, 1921년 상해로 가서 신규식(申圭植)과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22년에는 간도 용정(龍井)에서 군자금 조달을 위하여 미곡상을 경영하기도 하다가 1929년 이후에는 국내에서 서상일(徐相一) 등과 같이 군자금을 조달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의 숭고한 얼을 추모하고 후세 교육의 본보기로 삼기 위하여 장기사람들은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그게 2016년이었던가 보다.

이것만일까. 유배인들이 남긴 사료들을 활용한 문화관광 콘텐츠의 필요성을 깨달았다.

이미 경남 남해군이 서포 김만중 등의 유배역사를 유배문학촌으로 관광 상품화 했듯이 장기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흔적과 유산을 잘 활용을 하면 관광은 물론 주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여기에는 면장과 지역 시의원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고, 이강덕 시장 이하 포항시 담당자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다.

장기발전연구회 이민홍 회장이 연구한 우암의 ‘적거실기’, 필자가 그때까지 여러 고서에서 찾아낸 117명(현재는 220여 명)의 명단과 이미 발행된 ‘장기고을 장기사람 이야기’등도 실증의 토대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드디어 2019년 3월, 장기면 서촌리 일대 1만여㎡ 부지에 장기유배문화체험촌이 개관 됐다. 이곳은 앞으로 지조와 충절의 선비문화 계승을 위한 테마공간으로 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조선시대 장기지역에는 우암을 배향한 죽림서원을 비롯해 지역의 충신과 학자들을 모시며 강학(講學)을 하는 서원이 12개나 있었다. 한 개의 현(縣)에 12개의 서원이 있었다는 것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거기다 향교까지 있었으니 지방의 교육열이 어떠했는지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그 교육열은 현대까지 이어졌다.

당연히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별 네 개의 공군참모총장을 비롯한 장군, 국세청장, 도의회의장, 세무서장, 문경시장, 국회의원, 포항시장, 구청장, 정당의 위원장, 학교의 재단이사장, 교육장, 교수, 대학총장, 각 급 학교의 교장, 의사, 판·판검사, 변호사, 예술가, 문학인 등이 수두룩한가 하면, 재계를 주름잡은 굴지의 그룹 회장들이 줄줄이 나왔다.

그것뿐이겠는가. 사법·행정·외무고시에 합격한 자만도 수십 명이다. 그래서 ‘장기 가서 고시자랑 하지마라’는 유행어도 생겨나지 않았던가. 근래에는 정계, 관계, 학계 등에 두루 포진해 있는 장기사람들로 인해 ‘마카다(온통) 장기판’이라는 새로운 유행어도 나돈다.

장기사람들이 지금도 각계각층에서 선조들이 남긴 소중한 자산과 전통들을 이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동안 관심 있는 많은 독자들로부터 호응과 격려를 받았다. 글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장기를 찾아 한번쯤은 유배인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면 큰 소득이다. 장기유배문화체험촌에서 장기읍성 북문으로 이어지는 대숲 길은 숨겨진 비경이다. 그 길을 ‘우암과 다산의 사색의 길’이라 이름 붙였다. 누군가가 이 길을 거닐면서 우암과 다산이 이곳에 유배 와서 가졌을 사색과 고민이 무엇이었는지를 느낄 수 있다면 이제까지 필자가 연재한 이 졸필들의 보람으로 여길까 한다. /향토사학자 이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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