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홍경래의 난, 그리고 연좌된 사람들

홍경래의 난때 관군이 정주성을 에워싸고 농민군을 공격하는 모습을 그린 ‘신미 정주성 공위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세도정치란 국왕의 위임을 받아 정권을 잡은 특정인과 그 추종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조선의 정치형태를 말한다. 조선후기에 세도정치가 생긴 이유는 어린 왕이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른 탓이 컸다. 정조가 죽고 난 다음 열한 살 먹은 순조가 임금 자리에 올랐다. 이때 처가인 안동김씨 가문이 정치일선에 나섰다. 그렇게 34년 통치를 마감한 순조는 왕통을 아들 효명세자에게 이어줄 작정이었으나, 그 세자가 일찍 타계하는 바람에 왕위는 손자인 헌종에게 돌아갔다. 그때 헌종의 나이는 여덟 살 꼬마였다. 헌종의 어머니는 풍양조씨 조만영의 딸이었기에 이제는 풍양조씨가 정권을 좌지우지했다. 그 다음 임금이 ‘강화도령’으로 잘 알려진 철종이었는데, 철종의 비는 다시 안동김씨 가에서 간택되었다. 그래서 안동김씨의 세도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왕의 외척, 즉 처가나 외가가 권력을 잡았다고 해도 정직하고 바르게 정치를 했으면 별 문제가 없다. 문제는 외척세력들이 핵심 정치집단을 형성하면서 모든 권력을 장악한데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가문만을 위한 정치를 하게 되면서 부정부패가 판을 치기 시작했다. 특히 삼정의 문란이라 하여 전정·군정·환곡 등의 세금제도가 엉망이 돼 버렸다. 왕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가장 고통을 받은 것은 가난한 농민이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농업기술의 발전으로 농토에서 불필요한 노동력이 다량으로 축출되었다. 이들은 결국 고향을 버리고 유민(流民)이 되어 떠돌아다니거나, 세금을 피해 산속에 숨어 살면서 화전민이 되기도 했다. 더하여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광산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일부 광산은 이른바 잠채(潛採)라 하여 불법적인 형태로 채광되기도 했다. 농토를 잃은 유민들은 이런 광산에 모여들어 경제력을 모은 사람도 있었고, 더러는 화적패거리가 되어 횡행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이들이 조정에 대한 강한 불만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농민들 외에도 조정에 불만을 가진 층이 적지 않았다. 특히 평안도 지방은 대청무역(對淸貿易)이 활발해져서 유상(柳商:평양상인)이나 만상(灣商:의주상인) 가운데는 대상인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경제적으로 성장한 만큼의 사회적·정치적 지위가 따르지 못했다. 이들이 축적한 부(富)가 오히려 조정이나 수령들로부터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평양감사는 돈벌이가 가장 잘되는 가장 부러운 요직으로 여겨져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 유행어가 이래서 생겨났다.

지역적인 불만도 갈수록 누적되었다. 과거에 합격하더라도 한양의 양반들만 청요직에 임명되었고, 서북사람들은 한직에 배정되었다. 상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세도가와 결탁한 대상인들이 모든 이익을 독차지하면서 다른 상인들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각계각층에서 일어난 이런 불만 세력들은 서로 연결되어 뭉치면서 반항의 싹을 틔웠다.

그 반항의 싹이 1811년 12월 18일 드디어 밖으로 드러났다. 평안도 가산(嘉山)에서 일군의 무리들에 의해 저항의 기치가 올려 졌던 것이다. 그 중심에는 평서원수(平西元帥)라 불리던 홍경래(洪景來)가 있었다. 그는 평안도 용강 출신으로, 여러 차례 과거시험에 응시했지만 평안도 출신인 그가 합격할 수는 없었다. 사실상 평민이 된 그는 세상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비참한 삶을 목격했고, 이 상황을 갈아엎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홍경래는 비밀리에 동지들을 규합해 나갔다. 가산 지역에서 우군칙(禹君則)과 이희저(李禧著)를, 곽산 지역에서는 홍총각과 김창시(金昌始)를, 개천 지역에서 이제초(李齊初)를, 황주 지역에서 김사용(金士用) 등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이렇게 구성된 지도부는 사회에서 밀려난 다양한 계층들로 포진되어 있었다. 양반 출신인 진사 김창시가 있었는가 하면, 상업과 광업에 종사하였던 우군칙이 있었고, 대상인인 이희저도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지방차별 타파를 구호로 내걸었다. 당시 평안도가 안고 있던 정치·경제·사회적 모순에 대한 불만이 지역 공감대를 형성하여 이들을 하나로 묶었던 것이다.

지도부를 구성한 홍경래는 평안도 가산군 다복동(多福洞)을 근거지로 삼았다. 이곳에서 광산을 개발한다며 사람들을 모았다. 삽시간에 1천여 명이 모였다.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생활이 어려운 농민층이었다. 홍경래는 이들을 봉기군으로 조직하고 군사 훈련을 시행하였다. 1811년에는 전국적으로 대흉년이 들었다. 특히 평안도는 피해가 극심했다. 홍경래는 이때가 봉기에 적당한 시기라고 판단했다. 자신이 대원수를 맡고 부원수에 김사용, 선봉장에 홍총각, 후군장에 이제초를 배치하고 우군칙과 김창시에게는 모사(謀士)의 역할을 맡겼다.

 

김삿갓의 묘. 전국을 방랑하면서 각지에 즉흥시를 남겼는데 그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아 민중 시인으로도 불린다. 그가 이렇게 된 이면에는 홍경래의 난이 있었다.
김삿갓의 묘. 전국을 방랑하면서 각지에 즉흥시를 남겼는데 그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아 민중 시인으로도 불린다. 그가 이렇게 된 이면에는 홍경래의 난이 있었다.

홍경래는 봉기군을 남북 진영으로 나누어 행동을 개시하였다. 당시 봉기군의 초반 행로는 의외로 순탄하여 전투다운 전투 한번 없이 주변지역을 점령해 나갔다. 한순간에 가산과 곽산 관아를 접수하였고, 이후 정주·선천·태천·철산·용천·박천 등지를 접수하여 순식간에 청천강 이북의 아홉 개 읍을 점령하는 성과를 올렸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각 지역마다 내응세력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책임한 지방관들의 태도도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심지어 관청의 군교사령들이 봉기군에 가담하기까지 하는가 하면, 대부분의 수령들은 도망가기에 급급했거나 아예 항복을 해버렸다. 다만 가산군수 정시(鄭蓍)는 달랐다. 그는 끝까지 봉기군에 저항하다 살해되었다.

항복한 지방관 가운데 선천부사 김익순(金益淳)도 있었다. 김익순은 김삿갓으로 더 잘 알려진 김병연(金炳淵)의 할아버지다. 가산군수 정시는 싸우다가 죽어 영웅이 되었지만, 김익순은 봉기군에 항복했기에 천고의 역적으로 몰려 참형을 당했다. 그의 집안 또한 몰락했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김병연은 어머니와 형 등과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어머니는 이런 사정을 어린 김병연에게는 철저히 숨겼다. 불행한 가정사를 알 길이 없었던 김병연은 성장하여 향시에서 장원급제를 하게 된다. 그런데 당시 향시의 시제가 ‘가산군수 정시의 죽음을 논하고 하늘에 사무치는 김익순의 죄를 탄식하라’는 것이었다. 김병연은 김익순의 불충에 대해서 ‘한 번 죽어서는 그 죄가 가벼우니 만 번 죽어 마땅하다’고 했다. 그는 이 글로 장원급제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익순이 바로 친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스스로 천지간의 죄인이라며 삿갓을 쓰고 하늘의 해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초반에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봉기군은 그러나 박천의 송림전투에서 패전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어진 전투에서 거듭 패한 봉기군은 마침내 정주성으로 집결했다. 이후 3개월 동안 정주성에서 이루어진 봉기군의 저항은 처절했다. 계속되는 진압군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적극적이면서 조직적으로 대응했다. 정주성 밖에서는 관권에서 이탈된 민심이 성에서 농성하는 봉기군을 도우기도 했다.

대치가 계속되면서 진압군 측에서는 정주성의 함락이 여의치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화약을 매설하여 성을 폭발시킨 뒤에야 봉기군을 진압할 수 있었다. 그게 홍경래가 거병한 지 4개월 만인 1812년 4월 18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홍경래는 전사하였고, 약 2천938명의 봉기군이 체포되었다.

한편, 난이 진행되면서 조정에서는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일선 관리들에 대해 문책을 했다. 이에 따라 조선조 정치1번지로 통했던 경상도 장기 땅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연좌된 가족들이 줄줄이 유배되어 장기(長䰇)로 왔기 때문이었다.

우선 난이 채 진압되기도 전인 1812년(순조 12) 2월 6일, 정성한(鄭聖翰)을 참형에 처한 다음 가산을 적몰(籍沒)하고 연좌된 가족들을 유3천리 유배형에 처하는 판결이 있었다. 정성한이 살았던 평안도 철산부는 연대책임을 물어 현으로 강등시켰다. 이에 따라 그해 3월 28일, 정성한의 처 전녀(田女)가 장기로 유배되어 왔다.

정성한의 죄목은 숙부인 정경행(鄭敬行)과 같이 충신의 후손으로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받았고, 일찍부터 벼슬길에 나아가 지방 수령으로 있던 사람이었지만, 난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숙부와 조카가 나란히 봉기군의 두목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봉기군에 항복하여 용천현감이란 직책을 받기도 했다. 결국 봉기군에 군량미를 제공하고 진압군을 공격하는 등 모반 대역죄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난이 평정된 후에도 유배행렬은 계속되었다. 1812년(순조 12)년 7월 13일, 봉기군에 항복한 평안도 서림진(西林鎭) 첨사(僉使) 김인후(金仁厚), 임용(林溶)등에 대한 처벌이 있었다. 김인후가 항복한 것은 김익순과 다름이 없다하였고, 임용은 관리로 있었으나 난리를 듣고는 적진에 자진해서 들어가서 창감(倉監)이란 직을 맡았다가 승진되어 좌수(座首)까지 했다는 것이다. 모두 모반 대역죄를 적용하여 참형에 처했고, 가족들은 유배를 보냈다. 이에 따라 그해 7월 28일 김인후의 첩 점례(占禮), 그해 11월 12일에는 임용의 조카 임도양(林道陽)이 각각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다.

 

조선조 정치1번지 장기면에 들어선 유배문화체험촌 전경. 고즈넉한 둘레길을 따라 걷다 보면 조선조 유배형을 받고 이곳으로 온 220여명의 사연들이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조선조 정치1번지 장기면에 들어선 유배문화체험촌 전경. 고즈넉한 둘레길을 따라 걷다 보면 조선조 유배형을 받고 이곳으로 온 220여명의 사연들이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홍경래와 농민군이 봉기한 이유는 지역차별 없는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부패한 정권의 타도를 꿈꾸었다. 난이 성공을 하면 뛰어난 능력을 지닌 진인(眞人)이 나타나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고 했다. 이른바 정감록의 진인출현설(眞人出現說)로, 지배세력의 부정을 넘어 ‘이씨왕조’의 타도까지 꿈꾸게 하는 이념이 되었다. 그러나 한계도 있었다. 지방차별 타파라는 명분이 전국적인 호소력을 갖지는 못했던 것이다. 보다 더 큰 신분제폐지나 토지개혁, 그리고 당시 사회적 모순이 집약된 삼정(三政) 문란에 대한 개혁조치가 없었다는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 난은 세도정치를 타파하려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장기간의 준비를 거친 민란이었기에 19세기 농민항쟁의 선구적 역할로 평가를 받았다.

평안도민의 항거에도 불구하고 부세제도의 모순은 시정되지 않았다. 철종대에 이르자 불만을 품은 민중의 항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진주민란이었다. 홍경래의 난을 경험한 일반농민층은 봉건정부의 강압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의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는 대원군 집권기에도 이필제의 난(1871) 등으로 지속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1894년 갑오동학혁명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향토사학자 이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