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만든 경북여성 (6)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하)

박남옥 감독이 딸을 업고 영화 촬영하는 모습.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박남옥 감독이 딸을 업고 영화 촬영하는 모습.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남편 이보라는 1954년 6월, 산후 한 달이 막 지난 박남옥 앞에 시나리오를 던져줬다. 박남옥은 남편의 시나리오로 16㎜ 영화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35㎜ 영화가 쏟아져 나오던 때라 박남옥이 16㎜ 영화를 제작하려고 한 것은 제작비를 줄이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박남옥은 총 제작비 480만원 가운데 언니에게 280만원을 빌리면서‘자매영화사’를 차렸다.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출연 배우들도 대부분 박남옥이 영화일을 하면서 친분을 맺었던 사람들로 캐스팅했다. 스태프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애초부터 적은 돈으로 시작한 영화인지라 이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그녀가 겪은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돈이 있으면 영화를 찍었고 돈이 떨어지면 촬영을 중단하고 돈을 구하러 다녔다. 마침 시작된 장마로 촬영은 자꾸 늦어졌고, 출연자나 스태프가 나오지 않는 날도 있었다.
 

죽을 고비 넘겨가며 완성
“여성의 갈등·욕망 과감한 묘사”
‘화제’에도 4일만에 막내렸으나
42년 후 서울 국제 여성영화제
개막 초청작으로 상영 ‘재조명’

끝날 것 같지 않던 촬영은 6개월이나 걸려 끝났다. 그러나 촬영이 끝나자마자 엄마 등에 업혀 날마다 촬영현장을 지켰던 딸 경주가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딸에 대한 미안함과 자책감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렵사리 촬영이 끝나고 영화 녹음 작업이 남았다. 1954년 12월 18일 중앙청에 있던 녹음실을 방문했다. 그때 그녀는“16mm 영화라 안된다” , “여자라 재수가 없다”면서 온갖 푸대접을 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녹음을 끝내고 나니 이번에는 개봉할 영화관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여성감독이 만든 영화에 대한 선입견 때문이었다. 역시 딸 경주를 업고 영화 제작본이 든 궤짝을 들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닌 끝에, 겨우 1955년 4월 영화를 개봉할 영화관(서울중앙극장)을 구할 수 있었다. 러나 서울중앙극장에서 개봉한 영화‘미망인’은 안타깝게도 4일 만에 막을 내렸다. 35㎜ 영화의 홍수와 여성감독이 만든 영화에 대한 편견이 빚어낸 명백한 흥행실패다. 하지만‘미망인’은 당시 사회문제로 대두됐던 전쟁미망인을 소재로 여성의 갈등과 욕망을 과감하면서도 절제 있게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평론가와 관객들 사이에서 화제를 불러 모으기도 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미망인’을 만들었다. 목숨이 둘이고 셋이면 또한다. 그렇지만 목숨이 하나니 하나로 끝났지.”

우리나라 영화 한 편을 만들면서 박남옥은 거의 기진했던 것 같다. 영화에 대한 열정과 자신의 패기를 믿고 시작한 영화지만 여성에게 허락된 것이 거의 없던 시절, 영화를 만드는 일은 목숨을 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미망인’을 끝내고도 영화계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던 박남옥이지만, 그 뒤로 다시는 메가폰을 잡지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 목숨이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박남옥 감독의 기사가 보도된 경향신문.  /경북여성정책개발원
박남옥 감독의 기사가 보도된 경향신문.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최초의 여성감독’으로 돌아온 박남옥

일찍이 영화와 사랑에 빠졌던 박남옥은 결혼은 절대하지 않을 거라며 부모 애를 태웠다. 그랬던 그녀가 이보라와 결혼을 한데는 남편의 열렬한 구애도 구애지만 부모에게 덜 미안한 딸이 되고 싶었던 이유가 컸다고 한다. 그러나 여성에게 아내와 어머니라는 이름만을 허락한 시대를 거부하고‘여성감독 박남옥’이라는 이름으로 살기를 희망했던 그녀에게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을 것 같다.

영화‘미망인’이 상영된 이듬해인 1956년, 박남옥은 남편과 이혼하고 딸 경주를 자신이 키우기로 한다. 그 뒤로도 박남옥은‘시네마팬’이라는 월간 영화잡지를 창간해 해외화제를 취재하는 등 영화계를 떠나지 않았으나 1957년 아버지의 권유로 둘째 형부의 회사인 동아출판사에 입사하면서 결국 영화계를 떠나게 됐다고 한다.

단 한편의 영화만을 남기고 잊혀졌던 박남옥이 다시 돌아온 것은 1997년 제1회 서울국제여성화제에서다. 이 영화제에서‘미망인’은 개막 초청작으로 상영됐고, 박남옥은‘최초의 여성감독’으로 화려하게 컴백했다. 오랫동안 기억되지 못했던 그녀가 이 영화제를 통해 새롭게 조명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한국영화계에서 여성영화인들의 활약이 그만큼 뛰어났고 그 역량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제1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는 최초의 여성감독인 박남옥 감독을 기리는‘박남옥 영화상’을 신설했는데, 애당초 박남옥이‘최초의 여성감독’이라는 영예를 안기 위해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니었으나, 이제 새로운 길을 개척한 고난에 대한 보상이 후배 여성영화인들의 활약에 힘입어 제대로 주어졌다. 1992년, 박남옥은 일찌감치 유학길에 오른 외동딸 경주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신문을 보면서 일상을 보내고 있으며, 같은 아파트에 사는 노인들이 아름답게 늙어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녀가 세상에 남긴 영화는 단 한편뿐이었지만 그녀는 늘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고 세상 모든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내놓지 못한 미완의 영화들이 그녀의 아쉬움으로 남아있는 것 같지는 않다. 멀찍이 서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나이의 노감독은, ‘100m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한 번도 옆을 보고 딴 생각을 한 적이 없던’오로지 영화에 미쳐 있었던 한 시절을 떠올리면서“유감없지, 내 지난날에….”라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자료제공=경북여성정책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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