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굴사 홍주암 가는 길. 불굴사는 경산시 와촌면 불굴사길 205에 위치해 있다.

절을 찾아나서는 발걸음이 편하지가 않다. 들리는 소식이라곤 ‘코로나 19’ 확진자 증가수와 그들의 동선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불안한 마음으로 팔공산 뒤편,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불굴사로 향한다.

불굴사는 은해사의 말사로 신라 신문왕 10년(690년) 원효대사가 정진하여 득도한 곳에 암자를 세운 게 시초가 되었다. 한 때는 50여 동의 전각과 12개의 부속 암자, 8대의 물레방아로 쌀을 찧어 승려와 신도들의 공양미를 해결한 대사찰이었다고 한다. 소문난 기도 도량으로 알려진 절이지만 초행길이다.

썰렁한 절집에 혼자 들어설 거라 예상했는데 드문드문 보이는 불자들이 봄꽃처럼 반갑다. 하지만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 그들의 표정에서는 봄소식이 멀기만 하다. 모처럼 찾아온 맑은 공기와 햇살이 마당을 서성이며 봄소식을 전하지만, 반기는 이 없는 화창함이 제 그림자와 놀고 있다.

침묵에 싸인 풍경들이 서로를 품어주는 경내로 조심스럽게 들어선다. 일렁이는 햇살 속에 서 있는 보물 제 429호 삼층석탑 뒤의 극락보전, 조선 후기 건축물로 가장 오래되었다는 약사보전, 그 옆에 관음전까지, 전각들은 멀찍이 거리를 두고 서 있다. 활짝 열린 법당 문턱에는 서둘러 나온 봄 햇살이 졸고 있다.

나도 모르게 발길이 약사보전으로 향한다. 인자하고 온후해 보이는 약사여래입상은 1736년 큰비로 사찰 전각이 무너질 때 매몰되었다가 순천 송광사 노스님의 현몽으로 발굴된 것이다. 파손이 심한 왼손과 얼굴부분은 보수한 흔적이 보이지만,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과 같은 시기인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갓을 쓴 갓바위 부처님이 남성적이라면 족두리를 쓴 불굴사 약사여래불은 여성적이다. 양지인 갓바위와 음지인 불굴사의 지형적 특성에 따라 음양의 조화로 안치된 듯하다. 갓바위 부처님께 기도를 한 후 불굴사의 약사여래불에게도 기도를 하면 훨씬 더 영험함을 얻는다고 알려져 있다.

어떤 기도를 해야 할지 오늘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전국을 강타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에서 하루빨리 놓여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만 간절하다. 다른 날보다 더 넉넉히 불전을 놓고 절을 한다. 사재기를 하는 사람들을 비웃다가 결국은 마스크를 구하지 못해 더 큰 불안감에 갇혀버린 나를 위한 기도였으리라.

북적대던 오일장과 드나들던 금융기관이 폐쇄된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조용하고 작은 면소재지 마을은 더 이상 정겹지가 않다. 확진자가 늘어나면서부터 거리의 한적함은 공포로 변해 밤낮을 배회한다. 대구로 출퇴근하는 남편은 몇 장뿐인 마스크를 재활용하며 견디고 있다. 어린 손녀까지 있어, 마치 전쟁터로 남편을 보내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다.

절벽처럼 높다란 바위굴에 있는 홍주암을 향해 철제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무겁다. 원효대사와 김유신 장군이 치성을 드렸다는 약수터 앞에는 나와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불자 한 분이 기도 중이다. 마치 정화수 앞에서 비는 모습처럼 이색적이다.

기도 대신 서둘러 사진만 찍고 독성전으로 오른다. 순수한 아이의 눈빛마냥 무심으로 반짝이는 산 아래 풍경에 취해 있는데 봉사자 한 분이 홍주암의 영험함을 강조하며 초파일 등 달기를 권한다. 난처하다. 가진 것이 많아 가는 절마다 등 하나 달아주고 오면 얼마나 좋을까? 좀 전에 보았던 불자가 올라와 시선은 자연스럽게 옮겨졌다.

익숙하게 불전을 넣고 촛불을 켜는 일련의 행동들이 익숙하다. 모든 게 정성스럽다. 기도는 천천히, 안정감 있게 행해졌다. 차분한 눈빛과 자태가 그녀와 기도를 훨씬 돋보이게 했다. 나는 넋을 놓고 기도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호기심으로 지켜보던 마음에 묵직한 기운들이 번져오고 온몸이 따뜻해져 왔다.

조낭희 수필가
조낭희 수필가

어느 순간부터 정부에 대한 믿음이 깨지면서 불안감이 나를 지배했다. 무서운 속도의 전파력을 지켜볼 때마다 육신보다 정신이 먼저 병들 것 같은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다. 그녀의 일상은 나보다 훨씬 건강해 보인다. 사재기를 해야 할까 고민하거나 마스크를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 헤매지도 않았으리라. 산사는 그녀에게 좋은 도피처이며 위안처였음이 분명하다.

그동안 ‘방역실패’라는 말을 매스컴에서 접할 때마다 심장이 얼마나 오그라들었던가. 무능한 정치인과 재난을 이용하는 기회주의자들, 이해할 수 없는 이단 종교계로 화살을 쏠 때마다 허탈해지는 건 오히려 나였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분노와 비난보다는 감염병이 하루빨리 종식되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스스로를 다스리며 지킬 수밖에 없다.

오늘도 대문간에는 두 주 정도 버틸 분량의 마스크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넉넉지 않지만 급한 대로 나눠 쓰자는 친구의 말이 밤새 온기로 남아 나를 다독인다. 작은 것들이 쌓여 얼마나 깊어지는지를, 지혜로운 방법으로 위기를 대처할 줄 아는 크리스천 친구에게서 나는 예수님을 본다.

부처님이든 하느님이든 맹목적인 신암심보다는 힘들수록 스스로와 주변을 아름답게 밝힐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이 시대의 참된 종교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