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신유사옥과 다산 정약용(丁若鏞)

조선시대 다산 적거지 일대 모습 추정.  /사진 설명 이상준 향토사학자
조선시대 다산 적거지 일대 모습 추정. /사진 설명 이상준 향토사학자

노론의 거두 우암이 장기현을 떠난 지 120년이 지났다. 이제는 남인계열의 핵심인물 한 분이 장기현으로 왔다. 1801년(순조 1) 3월 9일 다산 정약용이 장기로 유배된 것이다. ‘신유박해’라고도 이름 붙여진 천주교 박해사건이 다산으로 하여금 이곳과 인연을 맺게 했다.

다산은 1762년(영조38) 6월 16일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태어났다. 다산이 태어난 해인 임오년(壬午年, 1762)은 영조의 아들로 세자에 책봉되어 임금의 대리청정을 맡아보던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해였다. 이 끔찍한 사건으로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싸움이 시작되었고, 이 싸움의 연장선상에서 신유옥사(辛酉獄事)도 일어났다.

다산은 나이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렸던 그는 큰형수(정약현의 처)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다산의 큰형수는 초창기 천주교 연구자인 이벽(李檗)의 누님이었다. 그래서 이벽은 누님의 집을 드나들면서 다산 형제와 깊은 교제를 나눴다. 그러다 큰형수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1784년 4월 15일에 형수의 4주기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다산 형제들이 고향에 모였다. 그곳에 이벽도 찾아왔고 제사를 지낸 뒤 함께 한양으로 가는 배를 탔다. 이 배 안에서 정약용은 둘째형 정약전과 함께 이벽이 건네준 서학(西學) 서적을 접하고 천주교에 잠시나마 빠져 들었다.

하지만 다산은 이때 이미 벼슬길에 올라있었고,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으며 바쁜 일과를 보내는 터라 천주교에 대한 관심은 그리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이 적힌 다산의 글을 보면 그는 분명히 천주교에 잠깐 관심을 가졌을 뿐이지, 깊이 믿지는 않았던 것 같다.

조선 중기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는 조선사회에서 보면 도리에 한참 어긋나는 사교(邪敎)였다. 성리학이 정치 이데올로기로 지배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산의 집안은 숙명과도 같이 초기 천주교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형수의 동생인 이벽은 조선시대 천주교 초기의 교도로서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한 주역이었다.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은 다산의 큰 매형이었고, 백서사건으로 처형된 황사영은 다산의 조카사위(정약현의 아들)였다.

조마조마하던 찰나에 천주교인들이 조선 양반사회를 뒤흔든 큰 사건이 일어났다. 신해년(辛亥年·1791년)에 전라도 진산 (珍山)에서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이 부모의 제사를 지내지 않고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다 발각된 것이다. 이른바 ‘분주폐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은 참형에 처해졌다. 사건의 당사자인 윤지충은 다산의 외사촌이었고, 권상연은 윤지충의 외사촌이었다. 이때부터 노론 벽파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남인 시파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공격의 대상은 이승훈(李承薰),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등이었는데 대부분 남인들이었다.

그러던 중 1795년 4월에 중국의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변복을 하고 몰래 들어와 북악산 아래에 거주하며 전교(傳敎)활동을 했다. 이 사실이 발각되자 주신부는 피신하였고, 그를 국내로 맞아들였던 지황(池璜), 윤유일(尹有一), 최인길(崔仁吉)은 체포되어 장살(杖殺)당했다. 이 일로 천주교 문제는 정치권 정면으로 부상했고 노론 벽파의 공세는 더욱 거세졌다.

 

다산의 적거지 재현. 장기유배문화체험촌에 있다. 다산이 장기에서 지은 시에는 그가 장기에서 겪은 유배생활의 실상이 적나라하다.  적거지는 보리타작하는 장기 농민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노래한 그의 시 ‘타맥행(打麥行)’을 모티브 한 것이다. 시에는 농민들의 삶에 대한 이해를 통해 자아를 성찰하는 진지한 태도가 잘 나타나고 있다.
다산의 적거지 재현. 장기유배문화체험촌에 있다. 다산이 장기에서 지은 시에는 그가 장기에서 겪은 유배생활의 실상이 적나라하다. 적거지는 보리타작하는 장기 농민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노래한 그의 시 ‘타맥행(打麥行)’을 모티브 한 것이다. 시에는 농민들의 삶에 대한 이해를 통해 자아를 성찰하는 진지한 태도가 잘 나타나고 있다.

연이은 천주교 관련 사건으로 정조 임금도 이제 더 이상 남인 학자들을 지켜주기가 곤란해졌다. 그해 가을에 이가환을 공조판서에서 충주목사로 좌천시키고, 이승훈은 예산현으로 유배를 보내고, 정약용은 우부승지(右副承旨)에서 금정 찰방으로 좌천시켰다.

이런 와중에 1800년 6월 정조가 갑자기 사망했다. 나이 어린(11세) 순조가 즉위하게 되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됐다. 그녀는 김한구(金漢耈)의 딸로서, 1759년(영조 35년) 정조가 세손으로 세워지던 바로 그 해에 14세의 어린 몸으로 영조의 계비가 되어 궁에 들어온 여자였다. 그녀의 오빠이며 벽파의 우두머리인 김구주는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홍봉한(洪鳳漢)을 축출하려는 상소운동을 일으켰다. 홍봉한은 정조의 외조부이자 시파의 영수였다.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이제는 왕의 미움을 사게 되어 그 해에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감형되어 흑산도로 귀양을 갔다. 김구주는 흑산도에서 9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다가 잠시 풀려났고, 1785년 다시 전라도 나주(羅州)로 유배되어 살던 중 얼마 못되어 숨을 거뒀다. 이렇게 김구주가 비참하게 죽자 그의 여동생인 정순왕후는 정조 재위 24년 동안 임금은 물론 남인 시파 사람들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를 벼르고 있던 참이었다.

1800년 11월 하순,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 정순왕후는 시파의 모든 고관들부터 파직시켜버렸다. 이에는 천주교가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1801년 1월 11일 정순왕후는 만약 서학을 믿다가 적발되면 코를 배고 멸종시키겠다는 엄금조서를 반포했던 것이다. 부모와 임금을 모시지 않는 천주교는 인륜을 파괴하고 교화에 어긋난다는 구실을 달았지만 실상은 천주교를 빌미로 시파들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이게 오늘날로 치면 대통령긴급명령 쯤 될 것이다.

이때 책롱사건( 冊籠事件)이 발생했다. 1801년 2월, 이때 명도회장(明道會長)이었던 정약종(丁若鍾)은 양근(楊根)에서 정순왕후의 긴급명령을 피해 서울로 이사와 있었다. 그는 신변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가지고 있던 천주교 서적과 성물(聖物),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편지 등이 담긴 책 고리짝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처음에는‘임도마’라는 신도에게 그 고리짝을 지게에 지게하고 나무꾼처럼 보이려고 솔가지로 덮었는데, 솔잎이 너무 적어서 몰래 잡은 쇠고기를 운반하는 것으로 의심받아 불심검문에 걸린 것이었다. 책롱 속에는 대 여섯 사람의 문서가 섞여 들어있었다. 그 가운데는 다산의 집 서찰(書札)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조사 과정에서 상자의 내용물이 밝혀지자 사건이 포도청에서 의금부로 이관되었고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역적으로 취급되어 심문을 받았다. 다산도 예외 없이 혐의를 뒤집어 쓴 채 1801년 2월 9일 하옥되었다.

먼저 권철신·이가환은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해 옥중에서 숨을 거뒀고, 2월 26일, 초기 천주교 지도자들인 이승훈·정약종·최필공·홍교만·홍낙민·최창현 등 6명이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를 당했다.

다산은 주변사람들의 도움으로 투옥 된지 19일 만인 27일 밤 이고(二鼓)에 다행히 죽음은 면하고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된 것이다. 전교(傳敎)를 위하여 청나라에서 건너온 주문모 신부도 모진 고문 끝에 그해 4월 19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종친 은언군의 부인 송씨와 며느리 신씨도 사사(賜死)당했다. 이게 이른바 신유사옥이다. 신유옥사라고도 한다.

다산은 유배가 결정된 그 다음날 길을 떠나 숭례문에서 남으로 3리에 있는 석우촌(石隅村)이란 마을에서 숙부님과 형님들을 이별하였고, 한강 남쪽에 있는 사평촌(沙坪村: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처자와 이별했다. 그믐날 경기도 안성(죽산), 3월 초하루 가흥(충주시 가금면)에 묵고 초이틀 충주에서 서쪽으로 30 리에 있는 하담(荷潭: 충주시 금가면)의 선영에 들렀다. 계속하여 탄금대를 지나 조령을 넘고 문경과 함창(경북 상주시 함창읍)을 거쳐 3월 9일에야 경상도 장기(長䰇) 땅에 도착했다.

장기에 도착한 다산은 마현리 ‘구석(龜石)골’ 늙은 장교(莊校) ‘성선봉(成善封)’ 집에서 기거를 하였다. 성선봉이 다산을 보호하고 음식을 제공하는 보수주인이 된 것이다. 성선봉은 장기현의 아전이나 군교로 짐작되고, 그의 집은 현재 장기초등학교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은 이미 예송사건에 휘말린 우암 송시열이 유배객으로 머물다 간 곳이기도 했다.

옥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801년 9월 15일 황사영이 중국 북경의 구베아(Gouvea) 주교에게 보내려 한 편지가 조정에 압수당한 것이다. 이른바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이었다. 백서의 내용에 충격을 받은 조정은 천주교인을 반역의 무리로 지목하여 그해 겨울 또 한 번의 옥사를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그해 10월 20일 정약은 장기에서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갔다. 다행이 이번에도 다산은 연루되지 않았다는 것이 판명되어 전라도 강진현(康津縣)으로 이배(移配)되어 갔다.

유배 첫해인 신유년은 다산의 총 유배기간 18년을 대표하는 한 해였다. 그래서 일까. 다산은 유배기간 동안 234편에 해당하는 537수의 시를 남겼는데, 이중에서 유배 첫해인 신유년(1801)에 남긴 시만 75편 184수에 해당한다. 신유년에 쓰인 이 작품들이 대부분 장기(長䰇)에서 창작된 것이거나 이곳에서 창작하여 후에 다른 곳에 가서 발표한 것들이었다. 장기에서 보낸 유배 첫해가 다산의 전 유배기간을 대표하는 해라고 여겨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산 우암 사적비. 장기초등학교 교정에 있다. 어찌 보면 노론의 거두인 송시열과 남인을 대표할 수 있는 다산은 영원히 같이 설 수 없는 앙숙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거쳐 간 이 자리에는 지금 두 분의 사적비가 나란히 사이좋게 서 있다.
다산 우암 사적비. 장기초등학교 교정에 있다. 어찌 보면 노론의 거두인 송시열과 남인을 대표할 수 있는 다산은 영원히 같이 설 수 없는 앙숙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거쳐 간 이 자리에는 지금 두 분의 사적비가 나란히 사이좋게 서 있다.

다산은 처음에는 장기의 풍물들을 시로 묘사하다가 차츰 그들의 삶 속에 있는 풍속과 애환을 그리는 데로 나아갔다. 그 속에서 민간의 가난함을 발견하고 가난의 원인이 당시 사회 체제의 구조적인 모순에 기인함을 밝히려 애썼다. 그는 이곳을 고향으로 삼으려는 마음을 가질 정도로 애착을 가졌다. 이런 마음은 시와 글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표출되었다.

그는 장기에서 시와 저술활동만 한 게 아니었다. 실학자답게 어부들이 칡넝쿨을 쪼개 만든 그물로 고기를 놓쳐 버리는 것을 보고 무명과 명주실로 그물을 만들 것을 권고했다. 그물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소나무 삶은 물에 그물을 담갔다가 사용할 것을 가르치기도 했는가 하면, 보(洑)를 만들어 물을 가두는 공법을 전수하기도 했다.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의금부도사에게 다시 체포되어 허겁지겁 압송될 때 이곳에서 저술한 기해방례변, 이아술, 촌병혹치 등의 저서가 분실되었다는 게 안타깝기만 하다. 하지만 그가 장기에서 남긴 기성잡시 27수, 장기농가 10장, 고시 27수 등 180여수나 되는 시와 그에 내포된 애민사상은 여전히 장기의 정신적 ‘유적’으로 남아 2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한 향기를 품어내고 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