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미경동화작가
최미경
동화작가

나는 세 아이의 엄마다.

선생이란 직업도 하지 않으면 불리지 않을 것이고 작가라는 명패도 쓰지 않으면 사라질 것이지만 ‘엄마’는 내가 아무것도 하질 않는다고 해도 떼어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엄마’의 무게란 게 불리는 횟수와 부르는 머릿수에 비례하는 듯해서 첫째를 낳고도 크게 느끼지 못했던 무게가 둘째를 낳고서 조금씩 무거워지더니 셋째가 생기고서는 세 아이가 동시다발적으로 부르는 ‘엄마’ 소리에 나는 고꾸라져 넋을 놓기 일쑤였다. 처녀 적에는 꼴딱꼴딱 잘도 새던 밤샘작업이 엄마가 되고서부턴 꿈도 못 꿀 일이 되었다. 그렇게 뭘 좀 써볼까, 하다 아이들보다 먼저 잠드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한번은 어느 새벽에 홀로 깨어 잠든 아이 셋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나’라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엄마’였던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 나는 세 아이의 엄마였다.

돈벌이를 게을리할 수가 없었다. 가르치는 일이 개중 잘하는 일이었으니 수업료의 크고 적음에 관계없이 가르칠 수 있으면 시작했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셋째를 맡길 때가 마땅찮아 초등학교 2학년 새학기가 막 시작된 첫째에게 학교를 일 년만 쉬면 어떨까, 라고 물었던 때도 있었다.

사내아이만 셋이라 먹는 양도 횟수도 달랐다. 눈만 뜨면 “배고파, 엄마.”라고 했으니 달걀은 서른 개짜리 다섯 판이 기본이고 20kg 쌀은 두 주면 바닥이 났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 입에서 “배불러”라는 말이 나오면 모든 엄마 역할을 다 한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옷은 어떤가. 아니 양말부터. 10켤레에 만 원 하는 모양 무늬 똑같은 시커먼 양말 다섯 뭉치를 사다 놓으면 열일곱 살, 열 한 살, 열 살. 세 놈이 번갈아 신어대서 어떤 놈이 구멍을 냈는지 모르는 오른쪽 양말이 다음 주가 되기 전에 다른 놈 왼쪽 발에 신겨 있었다.

그러니 일주일에 한 번 빨래를 돌리면 다섯 식구 양말이 35켤레, 다섯 식구 팬티가 35장이었다. 그래서 빨래 개는 걸 도맡아 하던 첫째의 제안에 따라 몇 년 전부는 옷장에 개어놓지 않고 빨래건조대에서 걷어입고 있다. 물론 첫째의 업무는 빨래 개기에서 세탁기 돌리기로 이전되었다.

그렇다. 나는 세 아이의 엄마다.

하지만 꾸역꾸역 밀려오는 이미지와 심상은 시어와 어휘는 ‘엄마’라는 말에 폭삭 젖어있어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쓰지 않으면 전전긍긍 댔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몸이 아팠다.

그래서 막내가 예비 초1이 되었던 그해부터 개학 1주일 전 아침 식탁 앞에서 ‘새학년맞이’ 덕담을 가장한 일관된 부탁의 말씀을 줄줄이 읊어댔다. 게다가 올해는 코로나19로 전국 모든 유치원, 초·중·고 개학이 1주일 연기되었다는 소식에 한숨을 토해내며 한 번 더 강조했다.

“올 한 해 무조건 건강할 것”

이젠 뭘 좀 아는 것 같은 열일곱 첫째와 아직 뭘 좀 더 알아야 할 것 같은 열한 살 둘째와 아무것도 몰라도 될 것 같은 열 살 셋째가 나란히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을 조금 쉬고 세 아이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셋째가 발랄하기 묻는다.

“아침 뭐 먹어?”

그렇다. 나는 세 아이의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