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해창 고등학교 교사

어느 토요일 아침, 북 콘서트에 참여했다. 저자의 강연과 참여자들이 주어진 질문으로 서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평소 자신에 대해 잘 아는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간단한 질문들 앞에서 머뭇거리는 나를 만났다.

질문은 이랬다. ‘좋아하는 계절은?’ ‘좋아하는 색깔은?’ ‘좋아하는 숫자는?’ ‘나를 닮은 동물은?’ ‘나를 한 글자로 표현한다면?’. 이 쉬운 질문들 앞에서 나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잠이 덜 깬 것도 아니었다. 내가 갑자기 무색무취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좋아하는 계절은?’ 봄과 가을이 좋아 보이는데, 왜 좋은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좋아하는 색깔은?’ 무지개가 떠올랐지만 하나를 고르기는 불가능했다. 흰색? 회색? 검은색은 아닌 것 같았다. ‘좋아하는 숫자는?’ 아, 숫자를 좋아해 본 기억이 없다. 난감했다. 숫자를 좋아할 수 있을까? ‘나를 닮은 동물은?’ 이건 대답하기가 비교적 쉬웠다. 돼지? 곰? ‘나를 한 글자로 표현한다면?’ 한 글자로 나를 표현하라니, 어떻게? 이 질문이 가장 어려웠다.

오늘 처음 본 짝에게 나를 ‘빛’ 같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이유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순간적으로 ‘빛’이 떠올랐다. 막상 말은 했지만 내가 진짜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횡설수설하면서 내가 ‘빛’인 이유를 댔다.

쉬운 질문에 대답을 잘못했다고 부끄럽거나 하지는 않았다. 신선했다. 대답을 주저했던 나에 대한 궁금증이 오히려 생겼다. 북 콘서트가 끝난 후 조용한 카페를 찾아 아까 받은 다섯 가지 질문을 떠올렸다. 종이에 질문과 답을 하나씩 적어가며 나 자신과 대화를 시작했다.

‘좋아하는 계절은?’ 봄. 봄이 주는 생기와 따스한 햇볕이 좋다. 바닷가를 걸을 때 불어오는 시원한 봄바람은 기분을 좋게 만들고 근심·걱정을 다 씻어주는 듯하여 좋다. 여행가기에 이보다 좋은 계절은 없다. ‘좋아하는 색깔은?’ 파란색과 흰색. 옷을 살 때 파란색과 흰색 상의를 종종 사는데 내 얼굴 톤이 이 두 색과 잘 맞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숫자는?’ 2. 전면에 나서서 무언가를 진행하기보다는 뒤에서 조력하는 쪽에서 더 편안함을 느낀다. 생각학교 2기라서 그런지 숫자는 2가 좋다. ‘나를 닮은 동물은?’ 팬더. 느릿한 행동과 느긋해 보이는 외모. 왠지 나를 쏙 빼닮았다. 직접 나를 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나를 한 글자로 표현한다면?’ 앞으로 되고 싶은 나를 표현해본다면 ‘물’이다. 노자의 ‘도덕경’8장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타인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모습. 예전에 동양고전을 공부하면서 물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런 질문에 잘 대답한다고 인생이 드라마틱하게 변하거나 대오각성하는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사소해 보일지라도 나와 관련된 질문들에 답하는 행위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가치 있는 일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를 더 잘 알아갈 수 있다. 나를 잘 안다면 크고 작은 삶의 변화를 앞두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나를 모를 때보다 조금 더 나을 수 있다.

짧은 도보 여행을 할 때 출발지가 없거나 명확하지 않다면 목적지를 정하기 힘들다. 설레는 마음으로 목적지를 정한다 해도 출발지를 모르면 어떻게 가야 할지 막연하다. 목적지만큼 출발지도 중요하다. 출발지는 현재 내 모습, 목적지는 내가 세우는 삶의 크고 작은 목표라고 할 수 있다.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다짐한 새해 목표는 잘 지켜지고 있는가? 포기하려는 마음이 들었다면 포기하기 전에 나를 한 번 살펴보자. 목표가 너무 거창하지 않은가, 내가 세운 목표는 진짜 원하는 것이었는가, 현재의 내게 무엇이 필요한가 등등. 질문을 던지면서 솔직하게 답 해보자. 이왕이면 종이를 펴서 생각을 글로 적어 구체적으로 나를 대면해보자.

목표가 부담스러운 이유는 출발지에 서 있는 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루 정도는 간단한 질문들로 나를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