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4관왕 ‘기생충’ 봉준호 감독 단편들 재조명
데뷔 전 찍은 단편영화서도
‘기생충’ 관통하는 주제의식
풍자·유머 고스란히 드러나

1993년 작품 ‘백색인’
평범한 직장인 양면성 짚어
박찬욱 감독과 인연 시작돼

다음해 내놓은 ‘지리멸렬’
사회지도층의 민낯 그려내
본격적으로 세계 주목 받아

지난 9일(현지시간)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감독·각본·국제영화상 등 4관왕을 차지한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미국 LA 더 런던 웨스트 할리우드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전주국제영화제 제공=연합뉴스
지난 9일(현지시간)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감독·각본·국제영화상 등 4관왕을 차지한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미국 LA 더 런던 웨스트 할리우드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트로피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전주국제영화제 제공=연합뉴스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오스카상 4관왕을 휩쓸면서 그가 본격적으로 데뷔하기 전 찍은 단편 영화들도 주목받고 있다.

풋풋한 20대 때 찍은 작품이지만 ‘기생충’에서 드러난 주제 의식과 날카로운 사회 인식, 풍자와 유머 등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떡잎’부터 남달랐음을 보여준다.

봉 감독이 ‘대외적으로’ 첫 단편영화로 꼽는 작품은 ‘백색인’(1993)이다. 연세대 재학 시절 제대 후 친구들과 만든 영화 연합 동아리 ‘노란문’ 활동 당시 연출했다.

주인공은 회사원 W. 출근길 주차장에 떨어져 있던 잘린 검지손가락을 발견한다.

 

지난 2004년 제5회 전주국제영화제 ‘인플루엔자’ Q&A 참석한 봉준호 감독(원내). 연합·전주국제영화제 제공=연합뉴스
지난 2004년 제5회 전주국제영화제 ‘인플루엔자’ Q&A 참석한 봉준호 감독(원내). 연합·전주국제영화제 제공=연합뉴스

그는 손가락을 주워 가죽으로 된 도장집 안에 넣은 뒤 출근하고 전화 버튼이나 TV 리모컨을 누를 때 사용하는 등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다. 심지어 깨끗이 씻어 귓가에 꽂기까지 한다. 그러다 손가락을 잃은 노동자가 사장을 때려 체포됐다는 TV 뉴스를 본 뒤 다음 날 출근길에 손가락을 개에게 줘버린다.

화이트칼라, 혹은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누구나 가진 양면성과 이중성, 사회에 대한 무관심 등을 짚었다. 주인공은 배우 김뢰하가 맡았고, TV 뉴스 속에 등장하는 손가락 잘린 노동자는 안내상이 연기했다. 김뢰하는 이 작품을 계기로 ‘지리멸렬’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 등에 출연하며 봉 감독과 계속 호흡을 맞춘다.

‘백색인’은 봉 감독과 박찬욱 감독을 이어준 작품이기도 하다. 훗날 ‘백색인’을인상 깊게 본 박 감독이 봉 감독에게 연락해 장편 시나리오를 제의한 것이다.

 

‘인플루엔자’ 스틸컷. 전주국제영화제 제공=연합뉴스
‘인플루엔자’ 스틸컷. 전주국제영화제 제공=연합뉴스

1995년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 후 사실상 실업자였던 봉 감독은 제의를 수락하고 시나리오 85%까지 썼지만, 전체적인 구조를 짜는 데는 실패했고, 그 기획 자체도엎어졌다.

봉 감독의 ‘인생을 바꿔 놓은’ 단편은 ‘지리멸렬’(1994)이다. 한국영화아카데미졸업작품으로, 30분짜리 옴니버스 형태다. 대학교수, 신문사 논설위원, 검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사회지도층’의 위선과 민낯을 풍자적으로 그린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바퀴벌레’. 도색잡지를 즐겨보던 대학교수가 학생에게 자신의 행적을 들키지 않으려 아슬아슬한 추적극을 벌이는 내용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골목 밖으로’)는 새벽마다 조깅하면서 남의 집 앞 우유를 몰래 마신 한 중년 남성 때문에 도둑으로 몰린 신문 배달 소년과 중년 남성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그린다. 그 남성의 정체는 에필로그에서 밝혀진다.

세 번째 ‘고통의 밤’은 술에 취해 노상 방뇨를 하려다가 경비원에게 들키는 엘리트 검사 이야기다. 에필로그에선 이들 세 사람이 ‘TV 심야 토론’에 나와 한국 사회의 문제점과 무너진 윤리에 관해 토론한다.

봉 감독은 “사회 고위층들의 독특한 기행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TV 토론 장면은 당시 ‘영화진흥공사’ 남산 세트장에서 촬영 중이던 영화 ‘남자는 괴로워’ 세트를 빌려 찍었다고 한다.

두 단편 모두 눈길을 끄는 대목은 ‘기생충’처럼 가파르게 계단을 오르내리는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는 점. 달동네와 고층 아파트, 가난한 집들과 부촌 골목길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지리멸렬’은 밴쿠버와 홍콩국제영화제 등에 초청돼 신인이던 봉 감독이 주목받는 계기가 됐다.

봉 감독이 2003년 선보인 ‘싱크 앤 라이즈’는 한국 영화 아카데미 20주년 기념으로 만든 6분짜리 단편이다. 한강 둔치 매점 주인이 딸과 함께 온 가난한 아버지와 ‘삶은 계란이 물에 뜨는지’를 놓고 내기를 벌이는 내용으로, 영화 ‘괴물’의 실마리가 된 작품이다. 변희봉과 윤제문이 출연했다.

2004년에는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 중 한편인 ‘인플루엔자’를 선보였다. 러닝타임 30분짜리 이 영화는 한강 다리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남자의 모습에서 시작한다. 내리막길을 향해 달려가는 한 남자와 그를 둘러싼 풍경을 무심한 CCTV 카메라를 통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 ‘지리멸렬’ 스틸컷. 전주국제영화제 제공=연합뉴스
영화 ‘지리멸렬’ 스틸컷. 전주국제영화제 제공=연합뉴스

사실 이들 단편에 앞서 봉 감독 생애 첫 단편 데뷔작은 애니메이션 ‘룩킹 포 파라다이스’다. 동아리 노란문 활동 때 ‘백색인’보다 먼저 연출했다. 고릴라가 주인공인 20분짜리 인형 애니메이션으로, 아르바이트해서 산 캠코더를 이용해 고릴라 인형을 일일이 움직여가며 촬영했다. 봉 감독은 ‘데뷔의 순간’이라는 책에서 “애니메이션을 했다가는 성격을 버리겠다는 생각에 꿈을 포기했다. 힘들게 사흘 동안 촬영했는데, 돌리면 10초밖에 안 나오니까 정말 허무하고 고통스러웠다”고 떠올렸다.

봉 감독은 뮤직비디오도 찍었다. 가수 한영애 팬이던 그는 2003년 ‘살인의 추억’ 이후 그해 9월 한영애 컴백곡 ‘외로운 가로등’ 뮤비 연출을 자청했다.

배우 류승범과 강혜정이 주연을 맡고 김뢰하, 박노식 등이 출연한 이 뮤비는 다양한 커플들이 골목길 가로등 아래서 키스하는 장면들로 이뤄졌는데, 흡연 장면 등이 문제가 돼 방송금지 판정을 받은 ‘비운의 뮤비’이기도 하다.

2000년에는 김돈규 노래 ‘단’ 뮤비도 연출한 바 있다. 지하철 안을 배경으로 배두나와 박해일이 감정 연기를 펼쳤다. 봉 감독은 한 뉴스 프로그램에서 “저예산 인해전술로 찍었다”고 떠올렸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