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중 포스텍 신소재 공학과 박사과정

얼마 전 일본 출장을 간 적이 있다. 일을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는 저녁 시간이라 남는 시간을 활용해 교토에 있는 금각사를 방문했다. 예전에 읽은 소설 ‘금각사’에 나오는 실제 금각사의 모습과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금각사는 1950년에 한 견습 승려가 지른 불 때문에 누각이 불타고 말았다. 소설 ‘금각사’는 그 견습 승려의 성장 배경을 그리며, 그가 왜 불을 질렀는지 이유를 다룬다. 주인공은 어렸을 때 금각사가 아름답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다. 하지만 직접 수도자로 경험한 금각사는 상상만큼 아름답지도 않았고, 금각사의 아름다움에 기대 주위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는 모습밖에는 경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주인공은 금각사의 아름다움을 타락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굳힌다. 결국 타락의 뿌리를 뽑기 위해 불을 지른다는 내용이다. 실제 금각사 방화범의 범행 동기도 ‘금각의 아름다움이 탐나서’라고 밝혔다. 대체 금각사는 어떤 모습이었길래 그런 행동을 했는지가 궁금했다.

정문에 도착해 입장권을 내고 들어가니 바로 황금색 금각이 보였다. 금각은 총 3층 구조인데, 위의 2층만 황금색으로 밝게 빛나고 있었고, 맨 아래층은 흰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금각 주위에는 연못과 나무들이 있었는데, 금각의 화려함과 자연의 모습이 선명한 대비를 이뤄 아름다웠다. 산속에 오로지 금각만이 밝게 빛나는 모양이었다. 주위의 관광객들은 금각과 주변 나무 풍경이 잘 어우러지는 자리에서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금각의 아름다움에 너무 큰 기대를 품었기 때문일까, 실제로 금각사를 보니 금세 시시한 마음이 들었다. 그저 금빛 3층 건물인데, 왜 이 건물을 그토록 아름답다고 할까?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금각사를 나와 산책길을 걷다가 문득 가까운 경주 불국사 내부의 석가탑과 다보탑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금각의 외형에서 석가탑의 단정하고 반듯하며 단단한 모습이 오버랩 되어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종종 친구들과 불국사에 갈 때면, 대웅전 앞에 서서 석가탑과 다보탑 중에 어느 게 더 낫냐고 묻곤 했다. 친구들마다 선택은 달랐지만, 나는 언제나 석가탑에 더 끌렸다. 다보탑의 화려한 모습과 개성도 인상적이지만, 그래도 단단하고 편안한 석가탑 모습이 더 좋았다. 그렇게 두 탑을 보고 있으면, 서로가 각자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느낌이 들곤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금 금각을 생각해 보았다. 금각은 산속에 홀로 서 있고, 오로지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만 비춰볼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은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볼 수 없기에, 아무리 스스로를 열심히 바라본다고 해도 타인이 보는 나를 명확히 알 수 없는 법이다. 어쩌면 소설 금각사에서 금각 주위가 타락하는 이유가 금각 혼자만이 아름답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스스로의 아름다움에 취하면 다른 사람의 진면목을 제대로 못 보는 것처럼.

삶의 여정 가운데 다양한 사람을 만나곤 한다. 금각처럼 화려하고 멋진 사람, 석가탑처럼 단단하면서도 조용한 사람, 다보탑처럼 개성이 넘치면서도 자신만의 뚜렷한 색을 지닌 사람. 첫눈에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들도 있고, 오래 만나면서 서서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다. 그중에는 사회에서 인정받아 금각처럼 빛나는 사람도 있고, 보이진 않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존재하는 석가탑 같은 사람도 있다.

아무리 금각처럼 반짝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잘난 맛에 취해 사는 건 아무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자신이 빛날 수 있는 건, 그런 빛을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무인도에서는 부와 권력이 아무 의미가 없듯, 한 개인의 잘남은 결국 사회 속 사람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어쩌면 모든 것을 다 갖춘 인간보다, 스스로 부족함을 알고 메꾸려 애쓰는 사람이 더 알찬 삶을 살지도 모른다. 삶에서 끊임없는 변화와 성장을 기대할 수 있는 것처럼, 석가탑과 다보탑이 서로의 부족함을 메꿔주는 것처럼. 삶이란 자신의 부족한 점을 직면하고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과 함께하며 나아가는 행위의 연속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