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래<br /><br />시조시인<br /><br />
김병래

시조시인
 

특별한 일이 없으면 거의 날마다 들판으로 산책을 나간다. 산책을 하노라면 들판은 살아있는 책이다. 철마다 새롭고 풍성한 내용으로 발간되는 계간지인 셈이다. 종교인들이 날마다 경전을 독송하듯이 하루에 한 페이지씩 신간 겨울호를 읽는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도 있지만, 자연이라는 살아있는 책을 읽는 것은 일종의 충전과 같은 것이다. 사람이 밥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수시로 정신의 배터리도 충전을 해야 몸과 마음이 정상작동을 할 것이다.

오늘의 페이지엔 수백 마리 청둥오리들과 오십여 마리 고니들이 운집해 있다. 청둥오리들은 보통 몇 십 마리씩 무리를 지어 다니는데 오늘처럼 수백 마리가 모여 있는 건 드문 일이다. 아마도 이 인근의 청둥오리들이 총집결을 한 것 같다. 거기다가 고니들까지 다 모여 시끌벅적 야단법석인 걸 보니 뭔가 중대한 의논이 있는가보다.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읽어보아도 그들의 사정까지는 독해(讀解)가 되지 않는다. 자연의 독법에는 모범답안 같은 게 없다. 저마다 안목과 기분에 따라 읽히는 대로 읽으면 그만이다. 저 철새들에 대해서 내가 뭘 아는 척 속단을 하거나 사람이라고 우월감 같은 걸 가져서도 안 되겠다는 것이 오늘의 독후감이다.

이번 겨울은 그다지 춥지가 않아서 산 채로 월동하는 풀들이 많다. 자세히 보면 양지에는 냉이, 광대나물, 별꽃, 봄까치꽃 등이 겨우내 꽃을 피우기도 한다. 벌이나 나비가 날지 않는 계절에 꽃을 피운들 열매를 맺지는 못할 터이니 한갓 무모하고 부질없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런 계산 따윈 하지 않고 사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있는 것이 생명의 본질임을 읽는다. 어느 철학서나 경전의 말씀보다도 절실하고 생생하게 읽히는 생명의 메시지다.

하지만 이 겨울들판의 주역은 마른 풀대들이다. 억새와 갈대는 물론 쑥, 명아주, 망초, 씀바귀 등 마르고 억샌 풀대들이 덤불을 지어 겨울풍경을 이룬다. 비록 생명이 다 빠져나간 껍데기에 불과하지만 이 들판의 생태계에서 그들의 역할이 다 끝난 것은 아니다. 겨울 들판을 지키는 파수꾼이랄까, 바람막이 역할이라도 하다가 새 풀들이 자라나면 삭아서 거름이 될 것이다. 살아서 월동하는 풀들과 마른 풀대들은 별개의 사물이 아니다. 어느 하나만 가지고는 끝과 시작이 맞물려 있는 이 계절의 진면목을 읽을 수가 없다. 삶과 죽음이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원리나 설명이 아닌 현상으로 보여주는 거라고나 할까.

겨울 들판은 마르고 앙상한 논리도 아니지만 비유나 추상도 아니다. 숨기거나 가린 것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들려준다. 왜곡이나 오류가 없고 넘치거나 모자람도 없는 존재와 생명의 자명한 진실일 뿐이다.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는 각자의 몫이다. 난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누구나 제대로 잘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욕심이나 어리석음에 눈이 멀어 오독이나 곡해를 할 수도 있고, 타성에 젖어 건성으로 읽거나 휴대폰에나 코를 박고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하루라도 산 책을 읽지 않으면 영혼이 방전된 좀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