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육사의 ‘고향 3부작’

시인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이육사문학관의 내부.

지난번 연재에서 필자는 육사의 시 중에서 고향을 연상시키는 ‘청포도(靑葡萄)’(문장, 1939.8), ‘자야곡(子夜曲)’(문장, 1941.4), ‘광야(曠野)’(자유신문, 1945.12.17)를 ‘육사의 고향 3부작’으로 규정하였다. 이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자야곡’은 ‘청포도’와 거의 반대되는 이미지와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청포도가 흰색과 푸른색의 청신한 대비를 통하여 아름다운 고향과 자연의 법칙처럼 반드시 오고야 말 광복의 희망을 감미롭게 노래했다면, ‘자야곡’에서는 더 이상 그러한 희망의 밝은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 아득한 매화향기를 통해
이 시에 등장하는
광야는 시인의 고향인 원촌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러한 매화향기를 바탕으로 이육사는
이 땅에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고자 한다.
기다림을 뛰어넘는
필사의 투쟁을 통해서만 새로운 세상은
도래할 수 있는 것이다. …

제목부터 생명의 푸른빛이 가득한 ‘청포도’에서 새까만 어둠으로 가득한 ‘자야곡’으로 바뀐 것이다. 자야곡은 자야(子夜)의 노래라는 뜻으로서, 자야는 자시(子時, 밤 11시부터 새벽 1시)인 한밤중을 의미한다. 또한 6연 12행으로 되어 있는 ‘자야곡’의 첫 번째 연과 마지막 연은 “수만호 빛이라야 할 내 고향이언만/노랑나비도 오쟎는 무덤 위에 이끼만 푸르리라.”이다. 수만호는 빛이 아름답고 광택이 나는 석영의 하나인 수마노(水瑪瑙)를 의미하는데, 본래 고향은 그 아름다운 빛깔로 가득해야 하건만 지금은 그 빛은 바랄 수도 없고 노랑나비도 오지 않는 곳이 되었다. 그 결과 무덤 위에 죽음을 연상시키는 푸른빛을 지닌 이끼만 가득할 뿐이다. 시의 나머지 부분에도 “검은 꿈”, “짜운 소금”, “바람”, “눈보라”, “매운 술” 등의 표현이 고향의 암담하고 괴로운 현실을 더욱 부각시킨다.

‘청포도’로부터 ‘자야곡’까지는 고작 2년의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토록 고향의 느낌은 달라진 것일까? 그 원인은 시대적 이유와 작가 개인 차원의 이유 두 가지를 모두 생각할 수 있다. 2년여의 시간 동안 일제의 탄압은 극단을 향해 치닫는다. 1939년 10월에는 국민징용령을 실시하였고 친일문학단체인 조선문인협회가 결성된다. 1940년 2월에는 총독부에서 창씨개명을 실시하였고, 8월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 당한다. 1941년 3월에는 초등학교 규정을 공포하여 조선어 학습을 전면적으로 폐지하였다. 바야흐로 일제는 조선인의 말과 성을 빼앗고, 황국신민화의 단계로까지 우리 민족을 내몰았던 것이다.

 

이육사의 삶과 문학을 다룬 책.
이육사의 삶과 문학을 다룬 책.

누구보다 민족의 아픔과 함께 해왔던 이육사 개인에게도 이 시기는 고통과 비극이 점차 강화되는 시기였다. 1941년 이육사는 폐질환으로 경주의 옥룡암 등에서 요양을 해야 했으며, 가을에는 명동 성모병원에 입원한다. 이 때 친동생처럼 가까이 지내던 시인 이병각이 이육사가 입원해 있는 성모병원에서 폐병으로 요절하는 아픔을 겪는다. 또한 이 해에는 유교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아버지 이가호가 별세하는 참극을 경험한다. 이러한 절망의 막다른 골목에서 탄생한 시가 바로 ‘자야곡’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로도 이육사가 겪는 고난의 강도는 가파르게 상승한다. 1942년 6월에 어머니가 별세하고, 두 달 후에는 가장 역할을 하던 맏형 이원기마저 사망한 것이다. 의지할 가족은 사라지고 자신의 폐병도 극한에 이른 상황. 범부라면 자신 하나도 추스르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육사는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앞을 향해 당당하게 나아간다. 1943년 4월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조국 광복을 위해 홀연히 베이징으로 떠난 것이다. 역사학자 김희곤에 따르면, 이육사가 베이징에 간 것은 당시 중국지역 독립운동계의 양대 세력인 임시정부와 조선독립동맹의 전선통일에 그가 일조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한다.(‘이육사 평전’, 푸른역사, 2010) 이육사의 중국행은 시인의 개인적 사정이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일종의 순국을 향한 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결국 그는 1944년 1월 16일에 베이징 감옥에서 짧지만 강렬한 삶을 마감한다. 그 죽음을 마주한 절대의 순간 유언처럼 창작한 시가 바로 ‘광야’이다.

 

이육사 시인이 태어난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이육사 시인이 태어난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광야’는 ‘꽃’과 더불어 해방 이후 1945년 12월 17일자 ‘자유신문’에 발표된 이육사의 유작이다. 이것은 마치 일제 말기 또 한 명의 저항시인이라 불리던 윤동주의 작품들이 해방 이후에야 유작의 형식으로 우리 민족의 품에 전달된 것과 비슷하다.

이 작품은 광야(廣野)와 황야(荒野)의 두 가지 의미 사이에서 고유한 시적 의미를 확보하고 있는 시이다. 제목이기도 한 광야(曠野)는 “아득하게 넓은 벌판”과 “버려두어 거친 들판”이라는, 즉 신성한 땅이라는 광야(廣野)와 황폐한 땅이라는 황야(荒野)의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육사는 다분히 이러한 중의성을 의식하면서 시적 효과를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이 작품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적 질서에 따라 시상이 전개되는데, 이러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 곳은 ‘광야(廣野)-황야(荒野)-광야(廣野)’로 변하는 것이다.

 과거에 이 땅은 닭 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으며 그 강한 산맥조차 넘볼 수 없는 신성한 곳(廣野)이었다. 그러나 현재 이 곳은 눈이 내리는 고난의 땅(荒野)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은 이 곳을 다시 신성한 곳(廣野)으로 되돌리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고자 한다. 그러한 도전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여전히 남아 있는 매화향기이다. 또한 이 매화향기는 이 시의 광야를 만주 대륙과 연결지어 바라본 그동안의 논의를 교정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매화는 황해도 이남 지역에서 자라기 때문에 만주에서 매화를 발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든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홀로 아득한 매화향기를 통해 이 시에 등장하는 광야는 시인의 고향인 원촌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매화는 매서운 눈보라와 추위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절의(節義)의 상징으로서, 조선 시대 선비들이 아끼던 꽃이다. 특히 이육사의 선조이기도 한 퇴계 이황은 매화를 각별히 사랑하였다. 퇴계는 매화를 매형(梅兄), 매군(梅君)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이 했으며, 죽기 직전에 시자를 시켜 매화에게 물을 주도록 했다고 한다. 이육사는 ‘전조기’(조선일보, 1938.3.2.)나 ‘은하수’(농업조선, 1940.10)와 같은 산문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의 집의 화단에도 옥매화, 분홍매화 등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매화향기를 바탕으로 이육사는 이 땅에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고자 한다. ‘청포도’에서 손님은 자연의 순환질서처럼 반드시 올 존재이지만, 지금은 그러한 기다림을 뛰어넘는 필사의 투쟁을 통해서만 새로운 세상은 도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고투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이 땅은 초인이 오는 광야(廣野)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고난과 시련이 심해질수록 더욱 강렬하게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저항하는 것은 오직 고매한 정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일이다. 실제로 수많은 문인들은 일제 말기에 제 한 몸을 건사하기 위해 온갖 오욕의 난경을 보여주었다. 이육사는 그 어지러운 난무 속에서도 진정한 의로움과 아름다움의 세계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청포도’, ‘자야곡’, ‘광야’로 이어지는 이육사의 고향 3부작은 우리 민족이 가장 어려웠던 시절에 써내려간 양심의 기도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문학평론가 이경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