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하회마을. /안동시 제공

앞선 글에서, 우리는 수우족의 관대함, 유록족의 정결과 절제라는 미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상이한 미덕의 저변에는 각기 다른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수우족의 불안은 무리로부터 낙오되는 것이었다. 가령 버팔로 떼나 적이 나타나면 그들은 서둘러 이동해야 했고, 그 때 마침 누군가가 산통 중이었다면 그 여성은 홀로 남아 아이를 출산하고는 서둘러 부족을 뒤따라가야 했다. 반면, 연어잡이 유록족에게 있어 가장 큰 불안은 연어 떼가 오지 않는 것이었다. 연어가 회귀하기까지 1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던 유록족은 그들의 일상을 정결과 절제라는 미덕을 중심으로 조직하였다.

 

안동 하회마을의 강 너머에는 높은 절벽이 있다. 절벽의 정상에 오르면, 하회 마을과 굽이치는 낙동강 상류의 절경을 보게 된다. 절경을 보고 내려오면, 중턱 즈음 나무들로 가려진 곳에서 유성룡 선생과 그의 형님이 거주했던 곳들을 발견한다. 왜 이들은 절벽의 정상에 떡하니 스카이캐슬을 짓지 않고, 중턱에 집을 지었던 것일까? 

이 두 부족의 사례가 반드시 각각의 맥락 내에서 이해되어야 함은 분명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잠시 불안이라는 심리적 기제에 한정하여 비교와 유형화라는 과감한 시도를 해보자. 의외의 시사점들이 발견된다. 먼저 우리 사회가 수우족과 유록족 중 어느 쪽과 더 닮아 있는지 질문해 보자.

에릭슨이 수우족을 방문했을 때, 근대식 학교의 교사들은 아이들이 걸핏하면 결석하거나 일이 생기면 그냥 집으로 가버린다며 불평하였다. 수우족 아이들이 근대식 교육의 경쟁에 적응하지 못했던 사실은 쉽게 납득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유록족은 이미 소유와 근대적 화폐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서부로 밀려드는 백인과 소유권 소송을 하고 있었다. 에릭슨의 기술 내에 유록족 아이들의 근대식 학교 적응에 대한 설명은 부재하지만, 그들의 양육에서 강조되었던 강박적 자기 절제 훈련이 근대 학교에서의 적응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였으리라는 추측은 합리적일 것이다.

유록족의 강박적 절제는 연어 떼의 회귀에 대한 불안을 견디기 위해 환상과 환각을 일상화시키고, 이 환상을 통해 내면과 신체를 통제하는 과정의 산물이었다. 그들이 환각에서 연어를 보는 일은 연어가 현실에서 오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즉 그들은 기다림의 시간에서 현실을 그들의 내면에 종속시켰던 것이다. 어찌 보면, 그들에게 연어는 열흘 동안만 현실일 뿐, 나머지는 모두 내면화된 연어였다. 그들은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자신만의 연어와 관계하고 있었고, 그들에게 부족이란 매우 느슨한 개념이었다. 그들은 철저히 개인주의자들이었고, 이들이 서구적 개인주의와 친화성을 가지리라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환상과 내면화된 연어가 우리에게 비범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연어에 대한 반증일 수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근대식 학교와 경쟁에 적응할 수 없었던 수우족에게서 우리와의 기묘한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유록족의 불안이 개인과 개인의 내부에서 개별화된 세계와의 사이에 놓여 있었다면, 수우족의 불안은 개인과 자신을 두고 떠나는 부족과의 사이에 놓여 있었다. 수우족의 불안은 결코 내면으로만 향하도록 통제되지 않았다. 이는 유록족이 연어 떼를 기다려야만 하는 수동적인 행위자였던 반면, 수우족은 버팔로를 쫓아 사냥하는 능동적인 행위자라는 점에서도 차이를 찾아볼 수 있다. 능동적 행위자였던 수우족은 그들의 불안과 공포를 외부의 적을 향해 전환의 형태로 완화시킬 수 있었던 반면, 유록족은 그들의 불안을 내면으로 체화시켜야만 했던 것이다. 이러했기에 에릭슨은 짧은 관찰에서도 수우족이 어떻게 그들의 공격성을 분출시켰는지에 대해 기술할 수 있었다. 그의 관찰에 따르면, 3년에 달하는 긴 수유기간 동안 아이의 이가 나면서 발생하는 최초의 공격성은 어머니의 젖을 무는 행위가 처음 나타났을 때 아이의 이마를 세게 가격하는 것으로 억제되었고, 이 때 아이의 우렁찬 울음은 용맹한 전사와 사냥꾼의 자질로 격려되었다. 즉 아이들의 공격성은 유예되었고, 이후 사냥감과 외부의 적을 향한 용맹함으로 전환 분출되었던 것이다. 또한 양육과정에서 아이들은 형제들을 지켜봄으로써 배뇨와 배변훈련을 익혔고, 놀림과 수치심을 의식하면서 사회성을 습득하였다. 에릭슨은 이러한 방식으로 습득된 사회성이 버팔로 사냥에 필수적이었던 협력과 형제애의 토대와 맞물려 있었다고 추론한다. 다시 말해, 수우족은 그들의 확대가족과 무리로부터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가진 교육열의 중심에는 타자와 이웃, 주위를 끊임없이 살피는 우리의 모습이 공존한다. ‘대세’라는 용어만큼 오늘의 우리사회를 보여주는 언어는 드물지도 모른다. 주위와 대세에 예민한 오늘의 모습은 우리가 겪어온 근대적 경험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근대화와 식민지 지배라는 험난한 시기를 거쳐 급격한 산업화의 역사에서 우리는 그 누구보다 능동적 행위자로 적응해야 했고, 시간적, 역사적 연속성(historical continuity)의 감각에 예민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능동적 행위자로서 변화에 적응했는가 혹은 대세를 놓치지 않았는가는 실제 현실에서의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맨 손으로 시작한 사업이 어떠한 선택들을 통해 재벌로 성장하였는지의 성공신화에서부터, 당시 강남에 땅 한 귀퉁이라도 사놓았는지, 그 아파트에 청약을 넣었는지, 학군을 잘 골라 이사를 갔었는지, 우리 아이를 그 학원에 보냈는지 등등 말이다. 아메리칸 드림이 노력에 대한 보상의 꿈이라면, 우리의 성공 신화는 급변하는 대세와 시류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해왔는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시류에 대한 민감성과 현실적 부의 창출 사이에서 개인이 경험한 인과성은 능동적 행동주의를 더욱 부추기며 효능감을 불러일으킬만한 것이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의태(mimicry)는 유기체가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먹이를 잡아먹기 위해 주변에 맞춰 자신의 모양, 색깔, 자세 등을 변화시키는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의태는 급변하는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우리 사회와 개인들이 자연스럽게 터득한 적응방식일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대세, 경쟁으로부터의 이탈과 낙오는 우리가 안고 있는 불안일지도 모른다. 주변에 맞추어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유기체에게 있어, 내면의 초점은 스스로가 아닌 주변과 타자에 맞추어져 있을 것이고, 타자와의 끊임없는 비교는 개인의 내면을 고갈시키는 관성일 수 있다. 종일 교실에 엎드려 있다가 방과 후 학원으로 향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이제 오늘날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승자가 없어 보이는 이 끝없는 경쟁에서 쉽사리 내려설 수 없는 것은 의태가 가진 관성 그리고 낙오에 대한 불안일지도 모르겠다.

안동 하회마을의 강 너머에는 높은 절벽이 있다. 절벽의 정상에 오르면, 하회 마을과 굽이치는 낙동강 상류의 절경을 보게 된다. 절경을 보고 내려오면, 중턱 즈음 나무들로 가려진 곳에서 유성룡 선생과 그의 형님이 거주했던 곳들을 발견한다. 왜 이들은 절벽의 정상에 떡하니 스카이캐슬을 짓지 않고, 중턱에 집을 지었던 것일까? 하회탈을 꼼꼼히 살펴보면, 당시에도 대세와 시류에 대한 대중의 열망은 분명 존재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카이캐슬을 택하지 않았고, 그 미덕은 우리의 내면 어느 깊은 곳에 집단 무의식의 형태로 남아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미덕은 앞으로 우리가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다시 불러일으킬 희망의 한 자락이 될 것이다. /경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