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미회사원
박현미 회사원

TV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상대를 짓밟고 생존하는 정글을 보는 느낌이다.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은 더 거북하다. 이들의 꿈을 지원한다는 미명 하에 가해지는 잔인함은 시청하는 내 인간성마저 파괴하는 기분이다.

입시와 취업 등, 세상 속에서 우리는 이미 매일 서바이벌 게임처럼 살고 있다. 학창 시절에는 성적순으로 자리를 지정하는 순간, 친구는 경쟁 상대로 변했다. 더 높은 곳에 오르겠다며 끙끙거리다가 대상을 알지도 못하는 분노로 마음이 가득 차기도 했다. 결국 능력 부족, 근성 부족, 체력부족이라는 장벽에 부딪혀 체념하고 말았지만.

오디션 서바이벌은 나처럼 뒤처지는 것이 싫어 도망치는 부류가 맘 편히 볼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 늘 경쟁에 져 울고 있는 이들에게 시선이 먼저 간다. 그들이 겪는 좌절이 안타까웠고 잘 털고 일어나길 바라는 무거운 맘으로 지켜봤다.

어느 휴일,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 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시선이 저절로 갔다. 사회자의 멘트 한 마디가 가슴에 콕 박혀왔다. “여러분은 옆에 친구들이 다 경쟁자라고 느껴지나요?” 참가자들은 어깨를 나란히 걸쳤지만 불안한 눈빛으로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부터 주어지는 팀 미션과 경연은 상대 평가가 아닌 절대 평가입니다. 모두 최선을 다해 커트라인을 넘겨 전원 생방송 무대에서 볼 수 있길 기대합니다.”

“와!”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도 환성이 터졌다. 기존의 오디션 방식에서 봤던 수없이 딛고 올라야만 하는 피라미드 구조가 아닌 함께 오르는 정상이라니. 왕좌에 올랐다 해도 미안함에 고개만 떨구던 승리자들, 그들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어야 했던 탈락자들, 기쁨과 좌절, 두 감정으로 얼룩진 현장을 보는 일은 나를 얼마나 피곤하게 했던가?

이번은 달랐다. 사회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어린 소년들은 얼싸안고 비명을 지르며 서로를 향해 맘껏 웃는다.

나는 이들의 동반성장을 무척 기대한다. 시간이 닿는 한 그들의 발전과 성장 과정을 지켜보려 한다. 승자독식 세상에 오래 함께 가는 것이 진정한 힘이고 바른길임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이 되었으면 좋겠다. 개별 인터뷰에서 벌써 이들은 한 뼘 더 자라 있었다. 본인들의 팀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다 함께 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제대로 해내겠다는 포부가 당차다. 결국에는 이들도 일부만 데뷔하고 각자 다른 길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로를 끌고 당겼던 기억은 살아가는 동안 큰 힘을 주고 자신감의 원천이 되어 줄 것이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연대하며 서로를 지지했던 추억을 오래 간직할 것이다.

얼마 전 포항에 이런 연대의 철학을 담은 ‘잉클링스’라는 북클럽이 생겼다. 잉클링스(Inklings)는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교수들이 만든 문학 토론 모임이다.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 C.S.루이스와 그의 형 워렌 루이스, ‘반지의 제왕’을 쓴 J.R.R. 톨킨이 주축이 되어 1930년부터 모임을 시작했다. 브런치를 나누며 읽은 책과 쓰고 있는 작품을 매주 1~2회 모여 잡담처럼 나누던 소모임이다. 포항 잉클링스도 전국 각지에 흩어진 멤버들과 책으로 연대하고 동행하는 것을 추진한다. 함께 호흡하며 느슨하게 연대해 서로를 격려한다. 포항 지역에서는 오프라인에서 ‘작가연구 소모임’에 참여해 위대한 작가의 작품으로 토론하고 이 결과를 한 달에 한 번 전국 각지의 멤버들과 문서로 공유하고 결국 책으로 출간해 모든 멤버들에게 선물한다. 포항에서 시작하고 전국 각지로 소모임을 확산해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지지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큰 용기를 얻는다. 연대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한마음이 되어 힘을 합해 추진하면 못해 낼 것 같은 일도 결국 해내게 된다. 그런 경험들이 쌓여 임계점을 넘는 순간 혼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진짜 변화를 느끼는 것이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개인주의가 만연한 시대, 무수한 경쟁 속 공감받지 못하는 고민과 현실 앞에서 이런 모임 하나 간직하며 연대한다면, 서바이벌 같은 세상도 조금은 살만하지 않을까? 모두 같이 성장하는 원팀(One team)을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