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에 찾아 들어간 대전 집은 아버지 혼자 지키고 계셨다. 어머니가 척추 디스크 수술로 입원하신 지 두 주째다.

여러번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는데, 귀가 안 좋아 못 들으신 것이었다. 결국 내가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고서야 문은 열렸다.

간단히 씻고 건넌방에 눕는데 전등 둘 중 노란 보조등 하나만 켜졌다. 발밑 쪽을 비추고 있어 그닥 부담스럽지 않았다.

고향에 돌아온 탕자 같은 심정으로 전전반측 이런저런 상념에 시달리다 겨우 잠이 들었다.

새벽부터 건넌방 바로 앞 주방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잠 없어진 아버지가 팔십팔세의 노구를 움직여 밥을 지으시려는 것이었다. 일어나 만류하려다 그대로 한참을 있었다. 어머니 입원 하시고는 저렇게 혼자 밥을 지어 드시는 것이었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아버지와 아들이 맛없는 아침밥을 먹는다. 아버지는 문득 옛날 옛적 인천에서 공고 다니던 시절에 서울로 대학 입학 시험 보러 가던 이야기를 하셨다. 충남 태안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인천으로 가출을 하다시피 올라온 아버지였다. 나와 아버지는 동창지간이었다.

식사를 하고 나서야 제대로 씻고자 하는데 어젯밤부터 욕조에 던져져 있는 속옷 한 벌이 눈에 심히 거슬린다.

아버지의 속옷을 난생 처음으로 손으로 주물러 빨았다. 기왕 시작한 것, 덤으로 벽에 걸려 있는 수건 두 장도 함께 빨았다.

체육학과를 나오실 정도로 건장하셨던 아버지는 십 년 전에 위암 수술을 받으시고 나으셨지만 이제는 몸에 뼈만 남다시피 하셨다.

체육을 전공하셨어도 아버지는 문학 지망생이기도 했다. 집에 남아 있는 문고판 영소설들, 펄벅의‘북경에서 온 편지’같은 소설책들은 아버지가 대학시절에 보시던 것들이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응모를 했었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들어보기도 했다.

고학생으로 입주 과외를 하며 대학시절을 보낸 아버지는 소설에 당선되지 못하고 대학원에 갈 수도 미국으로 유학을 가지도 못하셨다.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사회에 발을 내딛은 아버지는 홍성, 덕산, 대전, 부여 등지로 전근을 다니다 장학사 시험을 보고 교육청에 들어가 계시다 교감을 거쳐 교장으로 퇴직을 하셨다.

지금은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으시지만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엄청 많이 드셨다. 한번은 겨울밤에 마중을 나갔다 눈길에 쓰러져 계신 아버지를 부축해서 모셔온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못다 이룬 꿈을 약주로 달래신 것은 아니었던가 한다. 딸 하나를 두고 새로 어머니를 만나 아들 셋을 키우면서 당신의 삶은 무언가에 포박 당하신 셈이었다.

이제 어머니 계신 병원으로 가야 할 참이다. 이제는 내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음을 말없이 깨닫는다. 본래 인생의 순환이 그러한 것이리라.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