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상 정효각. 포항시 남구 장기면 산서리에 있다. 영조 때 효자로 이름난 김시상의 행적을 기리는 비와 비각이다.
김시상 정효각. 포항시 남구 장기면 산서리에 있다. 영조 때 효자로 이름난 김시상의 행적을 기리는 비와 비각이다.

강상죄(綱常罪)는 삼강과 오상의 도덕을 해친 범죄를 말한다. 삼강오상은 현대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삼강오륜과 같은 의미이다.

조선시대는 유교 윤리가 통치의 근간 이념이었다. 그 가운데 특히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본으로 여겼다. 그래서 불효죄는 본인을 처형함은 물론이고, 그들이 살던 고을 읍호가 강등되고 관할 수령은 파직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1751년(영조 27년) 9월경에 충남 예산에 살고 있던 박우천((朴右天)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는데, 그 죄목이 바로 ‘불효죄’였다. 박우천이 그의 어미가 죽었는데도 분상(奔喪)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분상이란 먼 곳에서 어버이의 죽음을 듣고 급히 집으로 달려오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상례(喪禮)에서 분상은 매우 중요한 절차였다. 그래서 분상하는 사람에게는 가능한 한 편의를 보아주는 것이 통례였지만, 상주가 이 절차를 어길 때는 가차 없는 처벌이 내려졌다.

통상적으로 유배를 온 사람들은 1~2년이면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관례적이었는데, 박우천은 어찌된 영문인지 유배가 풀리지 않았다. 그가 장기로 온지 10년이 되는 해였다. 박우천을 관리하던 장기현감이 그의 고향인 오산(烏山·현재 충남 예산) 현감에게 공문을 보내 사실조회를 했다. 그가 도대체 어떤 모진 죄를 저질렀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수개월 후 오산현감이 답장을 보내왔다. 우선 공부상에 적힌 범죄사실로는 강상죄의 구성요건이 충분했다. 이 사건의 당초 고발자는 박우천의 외삼촌인 김선의였다. 김선의는 나이가 많은데도 자식이 없었다. 게다가 가난하여 스스로 살아갈 수가 없어서 박우천에게 얹혀 의식주를 해결하고 있었다. 김선의는 노망(老妄)이 들어 정신도 오락가락했다. 조금만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좌수어른이나 관가에 고발장을 제출하기도 했다. 그래도 박우천은 그의 생질인 까닭에 감히 다투거나 따지지도 못하고 매번 순종하여 그의 청을 받아주었다고 한다.

 

삼효각. 포항시 남구 장기면 금곡리에 있다. 효자 허기와 그의 맏아들 허식의 처(경주최씨),셋째아들 허순의 처(곡광최씨)의 효열을 표창하기 위해 세운 정려각이다.
삼효각. 포항시 남구 장기면 금곡리에 있다. 효자 허기와 그의 맏아들 허식의 처(경주최씨),셋째아들 허순의 처(곡광최씨)의 효열을 표창하기 위해 세운 정려각이다.

그런데, 신미년(1751, 영조27)에 이르러 김선의가 박우천에게 돈 10냥을 달라고 해서 줬더니 그 돈을 생활비에 쓰지 않고 그의 처족(妻族)에게 줘버렸다. 박우천이 이 사실을 알고 그 돈을 돌려달라고 누차 말하였는데도 김선의는 돌려주지 않았다. 박우천과 김선의는 모두 성격이 날카롭고 표독한 사람들이었다. 둘은 이 문제로 술을 마시고 다투며 따지다가 술에 취한 김선의가 홧김에 관아에 박우천을 고발해버렸다. 김선의는 자신의 생질인 박우천이 그 어미가 죽었는데도 분상(奔喪)하지 않았고 또 약간의 돈을 갚지 않는다는 이유로 더러운 오물을 자신의 입속에 채워 넣었다는 것이었다. 실제 고발하러 온 김선의의 입에는 오물이 칠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감이 봤을 때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어미의 상(喪)에 분상하지 않은 것도 모자라 외삼촌을 구타하고 입에 오물까지 처넣었으니 천하에 이런 호래자식이 없다고 생각했다. 광패한 박우천의 행위에 매우 놀란 현감은 전라감영에 보고하여 그를 섬에 유배하기로 조율(照律)을 하다가 마침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보냈다는 것이 이제까지 인정된 사실이었다.

장기현감의 사실조회 요청에 따라 현임 오산현감은 신사년(1761, 영조 37년) 9월 초3일, 박우천의 10년 전 죄상을 물어보기 위해 그의 고향인 현내면 연지동(蓮池洞)의 좌상(座上) 윤취번(尹就幡)과 유사(有司) 배악불이(裵惡不伊), 그리고 박우천의 인척인 송인철을 불러 위에서 밝힌 인정사실이 틀림없는지 다시 조사를 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참고인들로 불려나온 동네사람들의 진술은 공부상에 적힌 위의 내용과는 좀 달랐다. 오물을 김선의의 입속에 채울 때에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기에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말할 수가 없으나, 모친상에 그가 분상하지 않았다는 일에 대해서는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당시 박우천은 관아에서 심부름을 하던 사령(使令)으로 있었는데, 관가의 심부름이 없는 날이면 관문(官門)에서 오래 지냈고 애당초 멀리 나간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어미의 병이 여러 달 낫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죽게 되었는데, 그때 박우천이 분명히 분상을 했다는 것이다. 발상(發喪)할 때 동네 사람들이 모두 가서 조문하였으며 행상(行喪)할 때에도 동네 사람들이 모두 상여를 메고 갔기 때문에 박우천이 상여를 뒤따라가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했다. 그 뒤에 박우천이 장사하러 다른 곳에 나갔다가 여러 달 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사실이 있었는데, 김선의가 이것을 분상(奔喪)하지 않은 것으로 허위 고발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박우천이 멀리 장기현으로 귀양을 간 사실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애매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진술했다.

김선의의 생질 송인철도 김선의는 외삼촌이고 박우천은 이종(姨從)간이 되지만, 어느 쪽도 두둔할 필요가 없다면서 본리(本里) 좌상과 유사의 진술내용이 사실과 다름이 없다고 못을 박았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10년 전에 내려진 박우천에 대한 유3천리의 판결은 사실인정에 중대한 오류가 있었다. 책임 있는 관리였다면 그 판결의 당부(當否)를 다시 심리하는 비상수단적인 구제방법을 거쳐 그를 즉시 해배시켜야 할 것이지만, 장기현감은 위와 같은 답변을 통보받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앉았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782년(정조 6년) 12월 6일 유배인들의 처리에 관한 형조의 문서에도 박우천은 여전히 장기현의 유배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정통 유학이 깊이 뿌리 내린 장기현은 “충효의 본고장”이라할 만큼 충효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장기면 양포리의 장인풍(張仁豊), 임중리의 김사민(金士敏), 산서리의 최학진(崔鶴振)과 김시상(金時相), 정천리의 김윤찬(金潤瓚), 금곡리의 허기(許琦), 대곡리의 박춘무의 처 김해김씨 등 조선시대 효와 열의 행적들이 정효각, 효자각, 열녀각과 함께 남아있다.

효자·열녀각에 얽힌 사연들도 각양각색이다. 특히 산서리 김시상의 효행은 효자비에 전하는 비문 뿐 아니라 ‘효행전(孝行傳)’이라는 서사적 구조를 갖춘 문헌설화까지 전해온다. 김시상은 영조 때 인물로 8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 소년가장이 된 시상은 집안이 가난하여 시장에 나무를 해다 팔아서 식량을 구해 어머니를 봉양해 왔다. 하루는 장터에 갔다가 어머니에게 드릴 고기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난데없이 솔개가 날아와 고기를 빼앗아 갔다. 난감해진 시상은 고기를 다시 사려고 했지만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머니의 밥상에 난데없는 고기가 덩그렇게 놓여있었다. 시상이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몰라 어머니께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아까 솔개 한 마리가 문 앞에 날아와 무언가를 떨어뜨리고 갔기에 자세히 보니 그게 고기였다고 했다. 그 묶은 끈을 확인한 결과 시상이 낮에 시장에서 산 것이 분명했다. 생각해 보니 어머니 밥상의 반찬이 허술하고 아들의 걸음이 늦음을 하늘이 알고 솔개를 보내 먼저 고기를 집으로 가져오게 했던 것이다.

언젠가 시상의 어머니에게 안질이 생겨 실명위기에 놓였다. 시상은 집 뒤에 정화수를 떠놓고 꿇어앉아 저녁마다 북두칠성에게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하늘도 감응을 받았는지 어머니의 눈이 다시 밝아졌다. 어머니의 연세가 일흔이 되었을 때였다. 병석에 누워 신음하던 어머니가 갑자기 숨을 거두려하자 시상은 칼로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하늘에 축원을 하면서 어머니 입에 드리우니 피가 목에 넘어가며 다시 회생하였다. 어머니는 그로부터 5년을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김사민 정효각. 포항시 남구 장기면 임중리에 있다. 효자 김사민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비와 비각이다.
김사민 정효각. 포항시 남구 장기면 임중리에 있다. 효자 김사민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비와 비각이다.

어머니의 상을 치른 후 시상이 하루는 성묘를 가는데 산처럼 큰 호랑이가 길목에 버티고 앉아 길을 막고 있었다. 시상이 호랑이를 꾸짖어 “너는 산중 영물이요 나는 인간죄인이라, 가는 길이 각각 다른데 어찌하여 어버이 보려고 가는 자식 앞을 막고 앉았는고? 빨리 산으로 가거라” 하니 호랑이가 물러갔다는 것이다. 하늘이 내린 이런 효자를 나라에서도 알고 영조 23년(1747)에 효자각을 건립하게 하였다고 한다.

장기 금곡리에는 ‘삼효각(三孝閣)’이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이곳에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한 허기(許琦)란 사람이 살았다. 그는 나이 18세 때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묘소 옆에 움막을 치고 기거를 하며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렸다. 어머니에게도 예를 다하고 공손하게 대하여 자식의 도리를 다 했다. 그는 나이가 어려 상을 당했던 관계로 아버지의 묘 터를 잘 골라 쓰지 못하였던 것을 늘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뒤늦게 좋은 명당 터를 찾아 이장을 한 다음 제사를 드렸더니 이상하게도 술잔에 부어두었던 술 3잔이 모두 말라 없어지는 게 아닌가? 이를 이상하게 여기던 차에 아버지 제삿날 제사를 지내고 고개를 들어보니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시와 똑 같이 제상에 앉아 있어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놀란 일이 있었다 한다.

허기에게는 허식(許湜)과 허온(許溫)이란 두 아들이 있었다. 허식은 장가 간지 8년 만에 불행하게도 세상을 떴다. 허식의 처 곡강 최씨(曲江 崔氏)는 남편이 죽자 3년 동안 머리를 빗지 않고 시어머니에게 정성을 다 했다. 시어머니가 이질에 걸려 한 달이 넘도록 자리에 눕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옷도 벗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면서 항상 곁을 떠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변을 손수 받아 처리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시어머니의 추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다.

허온의 처인 월성 최씨(月城 崔氏) 역시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허씨 가문에 시집 온 뒤에 며느리로서 도리를 다했다. 시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직접 변을 받아내기도 하고, 또 변의 맛을 보아가면서까지 병환의 상태를 점검하며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했다.

어느 해 겨울, 찬바람이 불고 눈이 하얗게 쌓인 날이었다. 시아버지가 갑자기 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최씨는 무작정 길을 나섰으나 고기를 팔러 다니는 상인이 없어 구하지 못하고 돌아오는데 홀연히 기러기 한 마리가 날아와 도로변에 앉았다. 최씨가 쫓아가서 손으로 잡아 그것으로 시아버지의 저녁 반찬을 해드린 일이 있었다.

이런 허기와 그 두 며느리의 효행은 금방 고을전체에 퍼졌다. 이에 조선 순조 때 도내의 유림(儒林)들이 연명하여 경상감사와 예조에 장계를 올렸더니 왕께서도 감명을 받고 정려(旌閭)를 내렸다.

‘반면교사’란 말이 있다. 부정적인 것을 보고 긍정적으로 개선할 때, 그 부정적인 것을 반면교사라고 하였다. 장기에 효자와 효부가 많은 이유는 애당초 유현(儒賢)의 고을로 예절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졌던 점도 있었지만, 강상죄로 인해 장기로 유배를 오는 여러 사람들을 접하면서 그들이 겪는 고통과 시련을 반면교사로 삼았던 것도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