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일문인’이란 그늘에 갇힌 장혁주

경북 예천군은 장혁주 소설의 주요한 공간적 배경이다.

일제 강점기를 대표하는 저항 문인으로 ‘청포도’와 ‘광야’의 시인 이육사의 오른편에 앉을 만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이육사가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할 때, 매우 우호적인 태도로 인터뷰를 한 문인이 있다. 조선일보 1932년 3월 29일자 기사에서 이육사는 그 작가의 응접실 겸 침실 겸용인 서재에 찾아가, “그의 눈은 리지에 타는 듯이 빗낫다(빛났다)”고 감탄하기도 하며 그에게 수필을 하나 써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이 날 이육사를 이토록 격동시킨 인터뷰이(interviewee)는 과연 누구였을까? 놀라지 마시라. 그는 다름 아닌 친일파로 일본과 조선에서 명성이 높았던 “조선 출신의 대일본제국의 작가 초 가쿠추”(시라카와 유타카, ‘장혁주 연구’, 동국대 출판부, 2009, 344면), 바로 장혁주(張赫宙)이다.
 

장혁주는 ‘나의 修業時代(수업시대)’
(동아일보, 1937.8.13.~15)에서
“예천(醴泉)의 산촌교원을 하면서 거기서의 체험을
기록했다”고 직접적으로 밝히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조선을 그린 대부분의 소설에서
경북 지역을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다.
주로 대구 경북 지방에만 머물다가
서른이 갓 넘은 나이에 일본으로 이주한 장혁주에게 대구 경북 지방이야말로
자신이 아는 조선의 전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을 올린 대표적인 친일문인으로서, 본명은 장은중이고, 일본명은 노구치 미노루(野口稔)이며, 귀화 이후 필명은 노구치 가쿠추(野口赫宙)였다. 장혁주는 일반인들에게는 잊힌 작가이지만, 엄청난 열정으로 수많은 작품을 써낸 일제 시기의 유명작가다. 등단하여 해방될 때까지 장혁주는 장편 15편을 포함한 소설 90여 편(조선어 작품 10여 편)을 발표하였으며, 단행본으로 30권 이상을 출판하였다.

장혁주는 일본어 글쓰기가 극히 드물던 1930년에 일본어 작품을 일본잡지에 발표하며 등단하였고, 조선어보다 일본어로 훨씬 많은 작품을 창작하였다. ‘문단의 페스토균’(1935)을 통해서 조선 문인들을 실력도 없이 질투나 일삼는 무리들로 매도한 바 있는 그는, 1936년 여름부터는 아예 도쿄로 이주해 버린다. ‘조선의 지식인에게 호소함’(1939)이라는 일본어 논설에서는 조선의 완전한 ‘내지화(일본화)’를 주장하며, 이를 위해 한국인의 단점을 고쳐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이후에도 당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여러 활동과 ‘이와모토 지원병’(1943)과 같은 국책에 순응하는 작품을 창작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일본에 머물던 그는 1952년에는 일본인으로 귀화해 사망할 때까지 창작활동을 이어갔다.

이육사의 인터뷰는 이번에 다루려고 하는 장혁주의 ‘餓鬼道(아귀도)’(가이조, 1932.4.)와 관련해서도 많은 것을 알려준다. 인터뷰는 ‘아귀도’가 수록된 ‘가이조’ 4월호가 “각 서점에서 짐을 풀자마자 전화가 빗발치듯 하고 나는 듯이 팔려 그 다음날부터 절품”이 되었을 정도로 큰 주목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이 무렵의 장혁주는 사회주의 문인으로서의 풍모를 풍긴다. 장혁주의 서재에는 프리체의 ‘예술사회학’과 같은 마르크스주의 계열의 사회과학 서적이 꽂혀 있으며, 가장 친한 친구로는 경주에서 함께 청년운동을 한 박로아를 들고 있다. 또 다른 글에서 장혁주는 ‘아귀도’를 쓸 무렵에는 “구레하라 고레히토(藏原惟人) 이하의 프로문학제이론의 영향이 외부적으로 졸작을 움직이었다”(‘정독하는 양 대가’, 동아일보, 1935.7.11)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구레하라 고레히토는 NAPF의 이론적 지도자로서 일본의 경향 작가들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지닌 비평가였다.

수십 년 전 예천의 시골 풍경.
수십 년 전 예천의 시골 풍경.

장혁주만큼 많은 작품에서 경북 지방을 소설의 배경으로 그린 작가도 드물다. 이것은 그의 개인적인 삶의 내력에서 기인한다. 장혁주 연구의 권위자인 시라카와 유타카 교수에 따르면, 그는 1905년 대구에서 구 한국군 장교를 지낸 아버지와 술집 등을 경영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순탄치 않은 가정 환경으로 어린 시절부터 생모를 따라 경상도 지방을 전전해야 했다. 이후 1926년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상북도 청송국 안덕면립학교의 교원으로 부임하였으며, 1927년에는 경북 예천군 지보면립보통학교의 교원이 돼 1929년 봄까지 머문다.

이때의 경험은 예천군 지보면을 배경으로 한 ‘아귀도’를 창작하는 원천이 된 것으로 보인다. 장혁주는 ‘나의 修業時代(수업시대)’(동아일보, 1937.8.13.-15)에서 “예천(醴泉)의 산촌교원을 하면서 거기서의 체험을 기록했다”고 직접적으로 밝히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장혁주는 조선을 그린 대부분의 소설에서 경북 지역을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다. 주로 대구 경북 지방에만 머물다가 서른이 갓 넘은 나이에 일본으로 이주한 장혁주에게는 대구 경북 지방이야말로 자신이 아는 조선의 전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장혁주의 등단작은 1930년 10월 ‘다이치니타쓰’에 발표한 일본어 소설 ‘白楊木(백양목)’이지만, 본격적으로 작가의 이름을 알린 것은 1932년 4월 ‘가이조(改造)’ 현상공모에 ‘아귀도’가 당선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아귀도’는 경북 예천 지보면을 배경으로 당대 조선의 농민들이 겪는 온갖 시련을 알뜰하게 모아 놓은 일종의 ‘고통 박물관’과도 같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제목이기도 한, ‘아귀도’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적나라한 생존의 막장이 펼쳐진 작품이다. 불교에서 유래한 말인 아귀도는 중생이 머무는 여섯 개의 세계(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아수라도, 인도, 천도) 중 하나로 이곳의 중생은 늘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괴로움을 겪는다. 이 작품에서는 1930년대 경북의 농민들이 겪는 괴로움을 드러내기 위해 단편의 분량 안에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다양하게 담아 놓고 있다. 이러한 과도한 의욕으로 인해 인물들은 뚜렷한 개성이나 심리도 없이 무한고통의 세계에서 신음하고 탄식하는 일종의 중생 차원에서 그려질 뿐이다.

 

장혁주 소설의 무대가 된 과거 예천의 시골마을 풍광.
장혁주 소설의 무대가 된 과거 예천의 시골마을 풍광.

농민들의 고통은 두 가지 사건을 계기로 발생하는데, 첫 번째는 가뭄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을 구제한다는 미명하에 벌어지는 저수지 공사장의 비인간적 상황이고, 다른 하나는 소작농의 불합리한 생산조건이다. 공사장에서는 감독과 십장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농민들 몫으로 배정된 알량한 돈을 가로채고, 농민들을 마소 다루듯이 채찍으로 때리기도 한다. 마을의 아녀자들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농사를 짓지만 수확을 해보아야 대부분을 지주에게 빼앗길 뿐이다. 이 와중에 가난과 빚을 감당하지 못해 야반도주하는 농민이 나오고, 풀즙이나 먹던 아이가 좁쌀을 급하게 먹어 급체로 죽는 사건이 발생하고, 칡을 캐러 갔던 부인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비극이 발생한다. 결국 인간 생존의 극한 상황에 몰린 농민들은 자연발생적으로 단결하여 십장과 감독들에게 저항하는 것으로 작품은 끝난다.

이 작품은 식민지 조선 현실의 핍진한 재현의 차원을 넘어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실천적 전망을 담아내고자 하는 경향소설로서의 성격도 선명하다. 그것은 이러한 빈궁과 고통을 그대로 감내하는 차원을 벗어나서 뚜렷한 저항의 모습까지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저항의 의식은 매우 선명한 것이어서, 이 작품의 도처에는 너무나 많은 복자(伏字, 검열을 통해 글자를 삭제하고 대신 X와 같은 기호로 표시한 것)로 인해 독해가 불가능한 부분도 여러 곳이다.

장혁주는 초창기에 복자로 독해가 어려울 정도의 정치의식이 강렬한 작품을 주로 발표하지만, 이러한 정치의식은 점차 약화된다. 나중에는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모습으로까지 변절한다. 이러한 변모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러한 비극은 작가 장혁주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대타자가 늘 일본이었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아귀도’를 비롯한 경향소설에 가까운 작품을 쓰던 시기는 “일본 문단에서는 프롤레타리아문학이 침체기에 접어 들어가고 있어, 한국 작가의 ‘동반자문학’이 참신하게 보였던 시기”이기도 하다. 장혁주는 이육사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어로 작품을 발표한 이유 중의 하나로 일본 문단에 “조선의 사정을 한번 소개”하려는 것을 들고 있다.

소설가 장혁주의 작품집.
소설가 장혁주의 작품집.

조선 농민에 대한 장혁주의 천착은 간절한 내적 고뇌와 양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일본 문단의 인정에 목말라 했기 때문은 아닐까. 인간이 견뎌낼 수 없는 고통에서 허우적거리는 동물화 된 조선 농민의 모습은 일본인들에게 흥미로운 이국적 소재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상징적 아버지가 일본(좁게는 일본 문단, 넓게는 일제)인 장혁주이기에, 일본의 요구와 태도가 변화되어 감에 따라 그는 동반자 문학가에서 순수 문학가로, 다시 순수 문학가에서 국책 문학가로 몸을 바꿔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자신을 지탱시켜 나갈 상징적 아버지가 너무나도 미약한 정신적 고아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당대 일본인 작가들이 장혁주를 겁이 많고 나약한 인물로 평가한 것도 한번쯤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방 이후 장혁주는 친일 행적으로 조국은 물론이고 재일조선인 사회로부터도 배척받았다. 그러나 1997년 별세할 때까지 창작활동은 계속 이어나간다. 흥미로운 것은 말년에 영어로 소설 창작을 시도했고, 실제로 1991년 12월에는 ‘Forlorn Journey’라는 영문 장편소설을 출판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영어 창작이 지니는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경북의 벽촌에서 문학을 시작한 장혁주가 일본보다도 더욱 강력한 아버지를 영어(미국)에서 발견한 것이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평생 자신을 옥죄던 한글과 일본어라는 굴레(한국과 일본)에서 벗어나 새로운 창작을 꿈꿨던 것이었을까? 장혁주는 해방으로부터 수많은 날이 지난 지금도,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 한국문학의 정체와 양심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있다.

소설가 장혁주는…

1905년 대구 출생. 보통학교 교원 등으로 일하다가, 1932년 일본어로 쓴 소설 ‘아귀도’를 시작으로 본격적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농민들의 처참한 실상을 사실감 있게 그려냄으로써 비판적 현실 인식을 보여줬다고 평가받는다. 일본 문단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해방 이후엔 일본인으로 귀화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무지개’, ‘삼곡선’, ‘여명기’, ‘인왕동시대’ 등이 있다.  /문학평론가 이경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