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끝내 대구를 사랑한 시인 이상화

흑백사진에 담긴 과거 대구 팔공산 풍경.

‘백조’ 동인으로 함께 활동한 박종화는 이상화의 등단작인 ‘말세의 희탄’에 대해, “강한 백열(白熱)된 쇠같이 뜨거운 오열(嗚咽)의 노래”라고 평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비단 그의 시뿐만 아니라 그의 인생 전체에 해당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구행진곡’(별건곤, 1930.10), 4연 16행의

이 시에는 비슬산, 팔공산, 금호강, 달구벌, 도수원과 같은

대구의 상징과도 같은 지명이 그대로 등장한다.

“넓다는 대구감영 아무리 좋대도/웃음도 소망도 빼앗긴 우리로야/임조차 못 가진 외로운 몸으로야 ”…

그의 몸 안에 흐르는 뜨거움이 없었다면, 42년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생애 동안 그 많은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문인을 넘어 사회활동가로도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3.1 운동을 비롯한 여러 독립활동에 참여하여 수감되기도 하였고, 신문사 총국을 운영하거나 교사로 재직하며 청년교육에 열과 성의를 바치기도 했다. 이상화의 열정적인 삶을 말하는데 있어 몇 번에 걸친 그의 뜨거운 연애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문학적 업적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생전에 한 권의 시집도 출판하지 않았고 60여 편의 시를 남겼을 뿐이지만, 그는 한국시사에서 대체 불가능한 자신의 자리를 구축하였다. 이상화는 한국 근대시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백조’ 동인으로 활동하며 병적 낭만주의의 시들을 발표하였다. 대표작 ‘나의 침실로’에는 3.1운동의 실패와 상징주의의 영향으로 인한 비애와 절망, 퇴폐와 죽음의지 등이 격정적으로 표출되어 있다. 이후에는 파스큘라(PASKYULA)와 카프(KAPF) 등의 진보적 문인단체에서 활동하며 날카로운 사회의식을 보여주기도 하였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명시를 통해서는 미적 감동을 동반한 저항시를 발표하였다.

 

1901년 대구 서문로에서 이시우와 김신자 사이의 4형제 가운데 둘째로 태어난 이상화에게 민족의식과 저항정신은 거의 생래화 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조부 이동진이 설립한 우현서루(友弦書樓)에서 교육을 받았다. 우현서루는 단순한 교육기관이라기보다는 대구를 비롯한 전국에서 온 독립지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곳이다. 민족정신이 투철했던 조부나 백부 등의 영향으로 이상화는 항일의식을 자연스럽게 체득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상징주의의 분위기가 짙게 풍기는 ‘백조’ 시기 작품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상화에게는 민족정신으로만 해명되지 않는 모더니티 지향적인 성격도 분명하게 보인다. 그것은 그의 삶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상화는 젊은 시절 고향 선배 박태원을 통해 영어와 서구 문학 등에 대한 많은 영향을 받는다.

이 무렵 보들레르를 비롯한 베를렌느 랭보 등의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에게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관심이 모아져 이상화는 파리로 가기 위한 중간경유지로 도쿄의 ‘아테네 프랑세’에서 2년간 공부하기도 하였다. 이상화는 일본에서 첨단의 서양문학을 공부하는 것과 더불어 함흥 출신의 신여성인 유보화와 깊게 사귄다. 그의 도쿄 체류 시기는 근대(서구)지향이 첨단에 이른 때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시간들은 ‘마돈나’를 애타게 찾는 ‘나의 침실로’를 통해 문학적 열매를 맺는다.

그러한 근대지향은 자의든 타의든 이상화의 삶을 이끄는 절대적인 힘이 되지는 못한다. 그가 일본에서 경험한 관동대지진은 그가 결국에는 조선인일 수밖에 없음을 강렬하게 환기시키는 폭력적 사건으로 작용한다. 1923년 9월 일본 간토지방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였을 때,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폭도로 몰아 끔찍한 학살극을 벌였다. 죽음을 코앞에 둔 이상화도 죽음의 문 앞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이러한 체험은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날과는 크게 달라진 오늘날 대구 팔공산 인근 모습 .
지난날과는 크게 달라진 오늘날 대구 팔공산 인근 모습 .

관동대지진 이전에도 이상화는 맹목적으로 일본이나 유럽을 지향하는 성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늘이 다 되도록 일본의 서울을 헤매어도/나의 꿈은 문둥이 살기 좋은 조선의 땅을 밟고 돈다”로 시작되는 ‘도-교-에서’(1922년 가을 창작. 1926년 1월 발표)라는 시를 보면, 새로운 것을 향해 일직선으로만 달려가기에 이상화의 몸에 흐르는 고향과 고국에 대한 애정은 너무나 뜨거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아시아의 모더니티를 대표하는 도쿄에서 누군가는 문명의 찬란함에 압도당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 모조품적 성격에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그 모던의 성채 앞에서 이상화는 문둥이 살갗 같은 ‘조선의 땅’과 ‘조선의 하늘’을 그리워했던 것이다.

1924년 귀국한 이상화의 시세계는 크게 변하여, 민족과 국토에 대한 애정이 전면화된다. 그것은 서양과 근대 문물에 대한 충분한 세례를 받은 후의 애정이기에 한층 미학적으로 정련된 결과물을 낳았다. 마치 2년 동안의 일본 체류 기간 동안 담아놓았던 고국과 고향에 대한 애정을 쏟아놓기라도 하려는 듯, 이상화는 자신이 평생 남긴 작품의 절반 이상을 1925년과 1926년 사이에 맹렬하게 발표한다.

이상화의 대표작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 1926.6)가 쓰여진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김학동이 쓴 ‘이상화 평전’(새문사, 2015)에 따르면, 이상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구상한 것은 연인 유보화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얼마 뒤 서울 교외의 푸른 보리밭을 거닐 때였다고 한다. 이상화는 해가 지도록 쉬지 않고 걸었지만 제목만을 간신히 얻어서 돌아왔다.

결국 이상화는 이 시를 완성하기 위해서 대구로 갔으며, 그 중에서도 대구 근교의 수성 벌판에 광활하게 펼쳐진 보리밭을 걷고 또 걸으며 명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명작이 육화(肉化)된 차원의 진실에서만 비롯된다는 예술일반론을 증명하는 사례인 동시에, 시인 이상화에게 대구가 얼마나 중요한 시적 모태인지를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좋은 시가 갖추어야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 시에는 이상화의 시를 일관하는 ‘쇠같이 뜨거운 오열(嗚咽)’이 선명한 이미지와 공감력이 최대치에 이른 비유 등을 통해 아름답게 시화되고 있다.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서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에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간결하지만 단단한 고발이 담겨 있으며, 그럼에도 생명의 순환 법칙처럼 오고야 말 광복을 에둘러 토로하고 있다. 그러한 견결한 메시지는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원융무애의 상상력과 우리 국토에 대한 뜨거운 애정에 바탕한 것이기에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1927년 초봄에 대구로 돌아온 이상화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대구를 떠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작품 창작은 뜸해지지만, 그 뜨거운 정신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사회활동은 계속 된다. 이러한 활동들은 모두 개인적인 영리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려는 공익이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대구’라는 지명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시 ‘대구행진곡’(별건곤, 1930.10)을 통해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4연 16행의 이 시에는 비슬산, 팔공산, 금호강, 달구벌, 도수원과 같은 대구의 상징과도 같은 지명이 그대로 등장한다. “넓다는 대구감영 아무리 좋대도/웃음도 소망도 빼앗긴 우리로야/임조차 못 가진 외로운 몸으로야/앞 뒷들 다 헤매도 가슴이 답답다”라는 부분에서는, 시인의 지사적 정신에서 비롯된 ‘쇠같이 뜨거운 오열’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질수록 이상화의 삶도 힘겨워진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친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고 왔다는 이유로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는가 하면, 무보수로 일하던 교남학교(현 대륜중·고교의 전신)에서 더 이상 우리말 수업이 불가능해져서 그마저도 그만두게 된다. 결국 그 뜨거운 오열을 가슴에 품은 이상화의 몸은 더 이상 일제의 무지막지한 칼날을 견뎌낼 수 없었던 것일까?

위암이 발병한 이상화는 1943년 4월 25일 숨을 거두고 만다. 공교롭게도 그 날은 대구가 낳은 또 한 명의 걸출한 문인 현진건이 별세한 날이기도 하다. 현진건은 어린 시절을 대구에서 함께 보낸 죽마고우일 뿐만 아니라 이상화를 백조에 소개해서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가능케 했던 문우였다.

지금 수성벌은 대구를 대표하는 아파트 단지로 변모하여, 이상화가 노래했던 “가르마 같은 논길”, “종다리”, “삼단 같은 머리를 한 보리밭”, “착한 도랑이”, “나비 제비”, “맨드라미 들마꽃”,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흙”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오늘의 봄도 나름의 아름다움으로 상춘객의 마음에 “봄 신령”을 지피게 한다.

다행히 수성 못가에는 시의 전문이 새겨진 시비가 세워져 있다. 봄날의 우리 들판을 누구의 강압도 없이 맘껏 즐길 수 있게 된 지금, 그 아름다움에 한번이라도 도취되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쇠같은 뜨거운 오열의 노래’로 민족혼을 일깨운 이상화를 위해 시비 앞에서 한번쯤은 모자를 벗고 예의를 표할 일이다. 나부터 봄이 오면 만사를 제쳐 두고 대구행 기차에 오르고 싶다.

작가 이상화는 …

190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 중앙고보를 수료하고 일본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다.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박종화와 더불어 ‘백조’ 동인으로 활동한 그는 1922년 시인으로 데뷔했다. ‘빈촌의 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대구 행진곡’ 등의 작품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대구 교남학교 교사 시절엔 독특하게도 복싱부를 만들어 주목받았다.

/문학평론가 이경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