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노론 벽파 김상로와 문성국, 소론 시파 조재한

만안교(萬安橋).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동에 있다.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러 갈 때 행렬의 편의를 위하여 만들어진 돌다리이다. 능행길은 원래 용산에서 한강을 건너고 노량진과 동작을 거쳐 과천을 지나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 그 길은 다리가 많고 고갯길인데다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가담했던 김상로의 형 김약로의 묘를 지나야 했기에 정조가 이를 불쾌하게 여겨 시흥을 거쳐 수원으로 향하는 길로 바꾸도록 명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안양을 거치게 되었고 그 길목에 삼성천을 건너는 만안교를 가설하게 되었다.

1776년 3월, 영조가 세상을 떠났다.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지 석 달 만이었다. 이제 세손이었던 정조가 마침내 스물다섯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던 정조가 왕위에 오른 첫날, 그는 여러 대신들 앞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천명했다. 편전에 도열해 있던 신하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영조가 죽기 전 남긴 유언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영조는 세손에게 ‘앞으로 20년 동안 사도세자를 언급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역모죄로 다스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정조는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밝히고 정국을 시작한 것이다.

조정은 아직 노론이 장악하고 있었다.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은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는 논리로 세손의 즉위를 결사적으로 막은 무리였다. 때문에 영조는 세손을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해놓은 상태였다. 그런 세손이 왕위에 즉위하자마자 세자 시절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었던 노론 벽파에 대해 처벌할 뜻을 비쳤으니, 다들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조의 정적(政敵)들에 대한 숙청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첫 번째 대상은 홍인한(洪麟漢)이었다. 홍인한은 정조의 외할아버지인 홍봉한(洪鳳漢)의 이복동생이었지만, 세손의 외종조부가 되는 것을 미끼로 안으로는 정후겸(鄭厚謙) 모자와 밖으로는 윤양후(尹養厚)·홍지해(洪趾海) 등과 결탁하여 위세를 부렸다. 형인 홍봉한은 사도세자를 제거하는 데는 암묵적으로 동의를 했으나 결국에는 정조를 도우려는 시파로 돌아왔지만, 작은 외할아버지인 홍인한은 세손의 즉위를 목숨 걸고 반대하는 노론 벽파의 영수로 그대로 남아있었다. 정조는 그런 홍인한부터 고금도에 위리안치시켰다가 사약을 내려 죽였다.

정후겸도 화를 피해가진 못했다. 정후겸은 본래 인천에서 어업에 종사하던 서인 출신이었으나, 영조의 서녀(庶女) 화완옹주(和緩翁主: 정치달의 처)의 양자가 되면서부터 궁궐에 자유롭게 출입하게 되었다. 영조의 총애를 받아 16세로 장원봉사(掌苑奉事)가 되고, 1767년(영조 43) 수찬에 올랐다. 이어 부교리·지평을 역임하고 1768년 승지가 되었으며, 이듬해 개성부유수를 거쳐 호조참의·호조참판·공조참판을 지냈다. 성격이 매우 교활하고 간사하였다고 한다. 그는 영조를 등에 업고 당시 세도가였던 홍인한과 더불어 국정을 좌지우지하다가 세손이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이를 극력 반대했다. 동궁에 사인을 비밀리에 보내 세손의 언동을 살피게 하였고, 세손이 금주령(禁酒令) 중인데도 술을 마셨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여기에는 사도세자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화완옹주도 한몫을 했다. 정후겸의 양어머니인 화완옹주는 과거 사도세자의 비행과 실수를 그대로 부왕 영조에게 고해바쳐 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게 하는데 일조를 한 인물이었다.

 

영의정 김상로의 묘.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에 있다. 비석하나 남아있지 않은 초라한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영의정 김상로의 묘.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에 있다. 비석하나 남아있지 않은 초라한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정조는 그런 정후겸을 경원에 위리안치시켰다가 사사시켰고, 화완옹주도 옹주 작위를 박탈하고 서인으로 강등시켜 사가로 내쫓았다.

그 다음 척결대상은 숙의문씨(淑儀文氏) 자매와 김상로였다.

숙의문씨는 원래 효장세자(진종)의 부인 효순왕후(孝純王后·영조의 첫째아들인 효장세자의 비)의 궁인으로 있었는데, 1751년 음력 11월, 효순왕후가 사망하자 그 빈전을 찾았던 영조의 눈에 들어 승은(承恩)을 입었다고 한다. 이후 문씨는 영조와의 사이에 화령옹주를 낳고 정4품 소원에 책봉되었다. 당시 영조는 승지에게 문씨의 후궁 교지에 어보를 찍으라고 하였는데, 승지 윤광의가 이를 거절하자 다른 승지를 시켜 어보를 찍게 할 정도로 그녀를 아꼈다고 한다. 그 후에도 문씨는 화길옹주를 낳았고, 종2품의 숙의(淑儀)로 진봉되었다.

이런 숙의문씨에게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녀는 1749년부터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자신의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하였다. 그녀에게는 문성국(文聖國)이란 친정오빠가 있었다. 그녀는 오빠 및 노론 세력과 결탁하여 영조와 사도세자의 사이를 이간질시키는데 혈안이 됐다. 이들은 영조에게 사도세자가 ‘침소에 문안도 제때 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찬을 살피는 일도 제때에 하지 않고, 심하게는 인명을 살해하고 여색을 지나치게 탐한다’ 고 일러바쳤다. 영조는 이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사도세자를 내쳤다. 결국 이들 형제들이 김상로와 같이 사도세자를 모략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장본인들이었다.

정조가 이들을 가만둘 리 없었다. 1776년 3월 30일, 정조는 숙위문씨의 작위를 박탈하고, 저자도(뚝섬)에 위리안치시켰다. 이날 이후 숙위문씨는 ‘문녀(文女)’라 하여 격하된 호칭으로 기록되어졌다.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1776년 8월 10일, 문녀는 정조의 결정에 따라 사약을 받고 죽었다. 숙위문씨의 어머니도 제주도로 귀양을 보내 노비로 삼았다. 문녀의 동생 문성국에게도 역률(逆律)을 적용했다. 졸지에 역적으로 몰려 노비로 격하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문성국은 그 다음날 부인과 함께 집에서 자살해버렸다. 그의 가족들은 연좌되어 노비로 전락하였고, 재산도 몰수되었다. 이때 문성국의 아들인 문경환(文景煥)이 연좌되어 경상도 장기(長䰇)로 왔다. 그게 1776년(정조 즉위년) 4월 1일이었다.

정조가 등극했을 때 김상로는 이미 죽고 없었다. 그래도 정조는 김상로의 관작을 추탈할 것을 명하였다. 그가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이간질시켰으므로 만고의 역적이라는 것이었다. 1762년 임오화변 때 김상로는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사도세자의 처벌에 적극 참여하여 왕의 동조를 얻었다. 그러나 후일 영조는 세손에게 남긴 글 등에서 ‘너의 아비를 죽이게 한 것은 아무래도 김상로다. 그 자야 말로 바로 너의 원수다’라고 지목할 정도로 그때의 일을 후회하면서 그를 청주에 유배보낸 적도 있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유언처럼 남긴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정조는 1776년(정조 즉위년) 4월 4일, 김상로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의 아내와 네 명의 자식들을 모두 관노로 삼게 했다. 이때 김상로의 며느리 효임(孝任)과 손녀 김주옥(金珠玉)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와서 노비가 되었다.

이 무렵 불꽃이 엉뚱한 곳으로 튀어 피해를 본 사람들도 있었다.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공세에 나섰던 소론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정조가 노론 벽파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자 그때까지 얼마 남아있지 않았던 소론 시파들은 고무되었다. 이들은 일부 온건 남인과 뜻을 같이하며 사도세자를 동정하던 무리였다.

소론은 정조가 즉위하자 즉시 상소를 올려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고 나왔다. 상소는 1776년(정조 즉위년) 4월 1일 시골 유생 이일화(李一和) 명의로 올라왔다. 내용은 임오화변에 이르게 한 해당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조재한(趙載翰)이 사주를 한 것이었다.

영조 때 승지와 대사간을 역임한 조재한은 소론으로 우의정을 지낸 조현명의 아들이자 조재호(趙載浩)의 조카였다. 아시다시피 조재호는 효순왕후의 오빠였다. 1759년 돈녕부영사로 있으면서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의 책립을 반대한 죄로 임천(부여)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나 춘천에 은거하였다. 1762년 임오화변 때 사도세자가 화를 입게 되자 그를 구하려고 서울로 올라왔으나, 오히려 홍봉한 등에 의해 역모로 몰려 종성으로 유배, 사사된 인물이었다. 그는 죽었지만 조카 조재한이 배후에서 소론 시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일화의 상소에 뒤이어 전 승지 이덕사(李德師)와 전 사간원 정언 유한신(柳翰申)이 똑같은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그때까지 명맥을 유지해왔던 소론들의 조직적인 공세였다.

이에 대해 정조의 태도는 뜻밖이었다. 오히려 이들의 행위에 대해 ‘어리석은 짓 아니면 미치광이 짓’이라며 크게 화를 냈다. 급기야 국청이 설치되었다. 잡혀온 조재한이 ‘이일화의 상소를 내가 사주했다’고 자백하자 정조는 그를 참형에 처했다. 이어서 이덕사, 유한신도 참수되었다. 이들의 죄목은 사도세자에 대한 언급을 할 시는 대역부도죄로 처단하라는 영조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4월 6일, 조재한의 연좌인으로 그의 조카 조상특(趙尙特)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와 안치되었다.

정조가 이런 조치를 내린데는 소론의 성급한 공세가 원인이었다. 겨우 즉위에는 성공했지만 정조의 왕권은 아직 노론에 맞서기에는 크게 미약했다. 게다가 정조뿐 아니라 소론도 사도세자 문제에는 딜레마가 있었다. 사도세자 비극의 정점에 영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의 원한을 풀려면 뒤주에 넣어 죽게 한 영조의 처분이 잘못된 처사란 것을 선언해야 하는데, 이 경우는 노론이 들고일어날게 분명했다. 이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영조의 손자인 정조의 태생적 모순이었던 것이다.

 

명의록(明義錄). 1776년(정조 즉위년)에 세손(世孫 : 정조)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반대하던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 등을 사사(賜死)한 일을 기록한 책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의록(明義錄). 1776년(정조 즉위년)에 세손(世孫 : 정조)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반대하던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 등을 사사(賜死)한 일을 기록한 책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무렵에 들어오면서부터 동해안 땅 끝 고을 장기현의 실상은 참담했다. 바닷가에 고기잡이 나갔다가 폭풍우를 만나 배가 뒤집혀 사람들이 빠져 죽기도 했고, 흉년이 연달아 들었다. 나라에서는 이재민을 구제하기 위해 휼전(恤典)을 베풀기도 했다. 흉년에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숱한 사람들이 기근과 역병으로 죽어나가자 당시 장기현감이 군작미(軍作米)를 풀어 백성들에게 조곡(助穀)으로 내어 줬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 오히려 벌을 받기도 했고, 감독기관인 경상감사가 파직되기도 했다.

이런 사정인데도 경상도 장기현으로 배정되는 유배인의 숫자는 늘어만 갔다. 지역의 열악한 살림으로는 넘쳐나는 유배인들을 보살필 여력이 없었다. 유배인과 지역민이 다 같이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런 세월이 8년간이나 지속되었다. 급기야 조정에서도 이 사실을 보고 받고 유배인들을 분산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에 따라 8년간 노비로 있던 숙의문씨의 조카 문경환은 1784년(정조8) 3월 2일, 살림이 좀 더 넉넉한 도내의 다른 현(縣)으로 이배되어 떠나갔다. /이상준 향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