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구와 인연깊은 소설가 현진건의 ‘고향’

서울행 기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대구역. 현진건의 ‘고향’은 대구역과 서울역 사이를 오가는 기차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서울행 기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대구역. 현진건의 ‘고향’은 대구역과 서울역 사이를 오가는 기차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다.

…그는 “두루마기 격으로 기모노를 둘렀고 그 안에선 옥양목 저고리가 내어보이며 아랫도리엔 중국식 바지를 입고” 있다. 같은 찻간에 있는 일본인과 중국인에게 “도코마데 오이데 데스카?”라거나 “네쌍나얼취?”라고 일본어와 중국어로 실없는 말을 건넨다. 그러나 일본인과 중국인은 모두 그와 말 상대를 해주지 않고, 결국 같은 조선인인 ‘나’에게 “어데꺼정 가는기오?”라고 말을 건넸을 때에야, ‘나’의 “서울까지 가오”라는 대답을 듣는다.…

현진건(1900-1943)은 김동인, 염상섭과 함께 근대적 단편소설의 미학을 확립한 한국근대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작가이다. 그의 단편소설들은 일상에 대한 정확한 묘사와 반어적 기법의 능란한 사용 등으로 독창적인 미학을 정립했을 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근대적 사실주의 문학의 초석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운수 좋은 날’이라는 작품 하나만으로도 한국인들의 가슴에 뚜렷하게 각인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대표작이 있는 예술가는 행복하다. 그 대표작을 통해 그 작가는 대중들과 쉽게 만나고 오래 기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표작은 예술가에게 온전한 축복만은 아니다. 그 대표작이 하나의 굴레가 되어 그 예술가가 평생을 기울여 창조해 놓은 세계의 일부만을 대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진건에게는 ‘운수좋은 날’이 축복이자 굴레이기도 한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운수 좋은 날’의 인력거꾼 김첨지를 통해 펼쳐지는 1920년대 경성의 풍경은 참으로 정밀하고도 풍요롭다. ‘동소문 근처의 집-전차 정류장-동광학교-남대문정거장-인사동-창경원-동소문 근처의 집’으로 이어지는 여로를 통해 근대도시의 풍광을 갖춰가던 경성의 모습과 그 속에서 철빈의 나락에 떨어진 하층민의 삶이 자상하게 펼쳐졌던 것이다. 또 하나의 대표작인 ‘빈처’ 역시도 경성을 배경으로 한 것이고, 현진건의 사회생활이 대부분 경성에서 이루어졌기에 현진건의 문학적 공간으로는 서울을 떠올리기 쉽다.

 

1960년대 대구역 풍경. 이보다 더 과거인 일제강점기에도 대구역은 존재했다.
1960년대 대구역 풍경. 이보다 더 과거인 일제강점기에도 대구역은 존재했다.

그러나 현진건은 대구와도 인연이 깊은 작가이다. 그는 1900년 9월 2일 대구 명치정 2정목(현 중구 계산동 2가)에서 대구부 전보사 주사 등을 역임한 아버지 현경운과 어머니 이정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으며, 이후에는 1913년 상경할 때까지 부친이 설립한 대구노동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며 자랐다. 현진건이 첫 번째로 문학 활동을 펼친 곳도 바로 대구다. 1918년 일본의 세이조오 중학교를 다니다 귀국한 현진건은 대구에서 이상화, 이상백, 백기만과 함께 등사판 동인지 ‘거화(炬火)’를 발간하며 활동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삶을 반영하여 대구가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하는 작품이 바로 ‘고향’이다. 작품의 ‘나’는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차중에서 맞은편에 앉은 기묘한 차림의 그를 만난다. 한중일 삼국의 특징을 한 몸에 체현하고 있는 그는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는 “두루마기 격으로 기모노를 둘렀고 그 안에선 옥양목 저고리가 내어보이며 아랫도리엔 중국식 바지를 입고” 있다. 같은 찻간에 있는 일본인과 중국인에게 “도코마데 오이데 데스카?”라거나 “네쌍나얼취?”라고 일본어와 중국어로 실없는 말을 건넨다. 그러나 일본인과 중국인은 모두 그와 말 상대를 해주지 않고, 결국 같은 조선인인 ‘나’에게 “어데꺼정 가는기오?”라고 말을 건넸을 때에야, ‘나’의 “서울까지 가오”라는 대답을 듣는다. 질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말을 했을 때, 즉 일본인도 중국인도 아닌 조선인이 되었을 때에만 그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온전한 한 명의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중일을 기괴하게 결합한 그의 외모와 언행에는 지나간 그의 삶이 압축되어 있다. 그는 대구에서 멀지 않은 K군 H란 외딴 동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가 살던 고향은 “넉넉지는 못할망정 평화로운 농촌”으로, 그곳에서 그는 남부럽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땅이 동양척식회사의 소유로 넘어가자 동척과 중간 소작인에게 모두 소작료를 내야 해서 그의 손에는 소출의 삼 할도 떨어지지 않는다. 결국 그를 비롯한 백 호 남짓한 주민들은 남부여대하여 타처로 떠나가야만 했다. 그 역시 열일곱 살 되던 해에 서간도로 이주한 것을 시작으로 신의주로 안동현으로 가서 품을 팔다가 일본에 건너가 구주 탄광과 대판 철공장에서도 일하다가 고향에 돌아왔던 것이다. 9년여의 시간 동안 재산을 모은 것은 고사하고 부모님만 모두 잃어서, 그는 무일푼의 혼자가 되었을 뿐이다.

‘고향’의 그가 열일곱 살에 떠난 고향을 9년 만에 찾아갔을 때, 고향은 “꼭 무덤을 파서 해골을 헐어 젖혀놓은 것” 같은 폐허가 되어 버렸다. 집도, 사람도, 개 한 마리도 없는 고향을 둘러보고 오는 길에 만난 유일한 고향 사람은 어린 시절 혼담도 오고 갔던 여자 하나뿐이다. 그녀는 열일곱 살 되던 겨울에 아비 되는 자가 이십 원을 받고 대구 유곽에 팔아 넘겼다. 이후 이십 원 몸값을 십 년을 두고 갚았건만 그래도 빚이 육십 원이나 남았었는데, 몸에 병이 들고 나이가 들자 주인 되는 자가 빚을 탕감해주고 놓아 준 것이다. 그녀는 지금 읍내에 있는 일본 사람 집에서 아이를 보며 간신히 살아가고 있다. 그녀가 십 년 동안에 배워 두었던 일본말 덕택에 그 취직자리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은, 유곽에 팔려간 이후의 모진 삶이 일본인과 관계된 것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그와 그녀는 일본 우동집에 들어가서 괴로움에 술만 실컷 먹고 헤어진다.

‘고향’을 읽는 포인트는 이 기묘한 행색을 한 ‘그의 얼굴’을 ‘내’가 ‘조선의 얼굴’로 받아들이게 되는 일이다. 마치 이 작품이 조선일보에 처음 발표되었을 때의 제목이 ‘그의 얼굴’이었다가, ‘고향’으로 제목이 바뀌어 수록된 작품집의 제목이 ‘조선의 얼굴’(글벗집, 1926)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처음 ‘나’는 기묘한 차림에다 일본어와 중국어로 횡설수설하는 그가 밉살스러워서 쌀쌀맞게 대한다. 그러나 그의 사연을 들을수록 “나는 그 신산(辛酸)스러운 표정이 얼마쯤 감동이 되어서 그에게 대한 반감이 풀려지는 듯”해진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차를 탈 때에 친구들이 사준 귀한 정종을 그와 함께 나누어 마시기까지 한다. 둘의 이 조촐한 공감과 연대는 그의 음산하고 비참한 눈물 속에서 “조선의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중에 둘은 취흥에 겨워서 어릴 때 멋모르고 부르던 노래를 읊조리는 것으로 작품은 끝난다.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고요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소로 가고요

담뱃대나 떠는 노인은

공동묘지 가고요

인물이나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가고요
 

실제로 한반도의 어느 곳인들 일제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겠지만, 대구도 그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도시다. 전영권 지리학자에 의하면, 박중양은 일본인들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해 대구읍성을 허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고종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1907년에는 대구읍성이 완전히 허물어졌으며, 지금은 그 흔적이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등의 지명에 남았다는 것이다.(‘대구여행’, 푸른길, 2014, 46쪽) 또한 식민지 시기에는 실제로 수많은 조선인들의 살기 위해 해외로 떠날 수밖에 없던 때이기도 하다. ‘고향’이 창작된 1926년까지 만주로만 옮겨간 조선 농민들이 35만 명에 달하고, 해방 전까지 만주나 일본 등에 살던 조선인이 400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이다. 따라서 그의 쓰라린 경험과 행색은 나름의 민족적 보편성을 지니는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작가 현진건도 대구노동학교를 거쳐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후에, 일본의 세이소쿠 예비학교와 세이조 중학교, 중국의 후장대학 독일어 전문부에서 공부하기도 하였다. 물론 현진건이 생계를 위해 일본이나 중국을 전전한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인으로서의 유학생활이 결코 비단길을 걷는 것처럼 편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현진건은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재직하던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언론계에서 물러난다. 이후에는 생활고로 큰 곤욕을 치르면서도 여러 편의 역사장편소설을 남겼다. 그 중에서도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무영탑’(‘동아일보’, 1938.7.20-1939.2.7)은 천년고도인 경주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석탑의 축조 과정을 통해 아사달의 초인적 예술혼과 민족정신에 대한 작가의 열렬한 옹호를 드러낸 이 작품에서, 아사달의 예술혼인 “신흥(神興)”은 한국인의 고유한 정신에 맞닿아 있으며, 아사달이 모든 것을 바쳐 완성하려 하는 무영탑은 조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무영탑’은 현진건의 여타 역사소설들이 그러하듯이, 시대적 압박에 맞서 우회적으로 현실에 대한 비판과 전망을 담아냈다는 점에서 문학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개인적인 병마와 생활고 그리고 그보다 몇 곱절 쓰라린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의연하게 민족의식을 견지했던 현진건의 문학과 삶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 대구 두류공원에 1996년 세워진 그의 문학기념비는 그 불굴의 문학적 영혼에게 바치는 대구 시민들의 작은 술잔이다.

작가 현진건은…

1900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당시 보통의 아이들처럼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12살 때 일본 세이조중학으로 옮겨 공부를 이어갔다. 조숙했던 그는 1918년 이상화, 백기만 등과 함께 동인지 ‘거화’를 내기도 했다.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고,‘술 권하는 사회’ ‘운수좋은 날’ ‘고향’ 등의 단편과 ‘무영탑’ ‘타락자’ 등의 장편을 남겼다. 사실주의 작풍을 선도한 그는 ‘근대 한국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문학평론가 이경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