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 논설위원
안재휘 논설위원

진보 정치학계의 대표적 학자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지난달 초 한 학술회의 기조 강연에서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본질은 한국 진보의 도덕적, 정신적 파탄”이라며 “한국의 진보파가 이해하는 직접민주주의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를 뿐 ‘전체주의’와 동일한 정치체제”라고 비판했다. 그는 모든 국정운영의 중심에 놓은 적폐청산 드라이브가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인 삼권분립과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실현될 수 없도록 만드는 패러독스라고 지적했다.

정권 중심부를 향해 사정(司正)의 칼끝을 겨누던 윤석열 검찰총장의 수사팀 핵심 간부들이 모조리 전보 인사조치를 당했다. ‘검찰개혁의 일환’이라는 포장술이 동원됐지만, 당위성이라곤 전혀 없는 핑계로 들린다. 4월 총선이 그리 멀지 않았는데도 정권이 겁 없이(?) 던진 인사폭탄을 놓고 해석이 봇물을 이룬다. 청와대가 검찰의 칼날이 얼마나 무서웠으면, 얼마나 뒤가 구리면 이렇게 무리수를 두겠느냐는 말조차 나돈다.

문재인 정권 초반 서울중앙지검장으로 파격 발탁된 윤석열은 죽은 권력, 지나간 정권에 대해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펼친 정치보복의 첨병이었다. 그는 보수 정권 전직 대통령 두 사람을 모두 영어(囹圄)에 잡아 가두었다. 그러나 지난해 검찰총장으로 발탁된 이후, 조국 등 여권 인사들의 의혹에 대한 수사를 시작하면서부터 일순간 판이 거꾸로 뒤집혔다.

윤석열은 토사구팽(兎死狗烹)의 낭떠러지 끝에 내몰렸다. 지난 정권 때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긴 윤석열은 이 정권에서 ‘정무 감각 없기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인상적인 말을 또 남겼다. 그는 자신이 불의를 수사하는 사냥개로서 우직한 본능을 지닌 검찰임을 자인한다. 박근혜도 문재인도 그를 잘못 알기는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아니, 광화문에서 패 갈라 상반된 함성을 펼치는 군중들 모두 윤석열을 오해하며 아전인수의 섬에 함께 갇힌 것은 아닐까.

문재인 정권이 이렇게 막 나갈 수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조국 대란’이 제아무리 나라를 뒤집어 놓아도, 무도한 검찰 무력화(無力化) 공작에도 문재인 지지도는 국민 절반, 여당 지지도는 제1야당의 두 배를 유지한다. 그들이 악착같이 추구해온 ‘선악 갈라치기, 보수세력 궤멸 의지’를 앞세운 끈덕진 진영대결·청백전 정치는 성공하고 있다. 국민의 ‘옳고 그름’ 판단력을 퇴화시키려는 목적에 기어이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공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오늘날 민주주의는 장군들이 아니라 선출된 지도자들, 즉 대통령·총리의 손에서 죽는다. 시민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완전히 이해했을 땐 너무 늦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 위기 신호로 ‘심판매수’, ‘비판자 탄압’, ‘운동장 기울이기’, ‘무조건적 반대’, ‘권한 남용’, ‘반국가 세력 낙인찍기’ 등을 든다. 엇나간 민주주의의 찢어진 실루엣 앞에 이 나라 민주주의는 점점 더 위태로운 벼랑길로 치닫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