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많은 혁신적인 기술들은 처음엔 마치 ‘오즈의 마법사’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초자연적 ‘마술’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우리를 매혹시키며 우리의 생사화복을 쥐고 있는듯 우리 위에 군림한다. 그러다가 점차 많은 사람들에게 그 원리가 폭로, 혹은 이해되어 모두가 알만한 모습이 되면서 그 기술의 자리가 점차 낮아지다가 결국엔 모든 이들의 손에 들어가 그들 삶의 일부가 된다.

‘오즈의 마법사’라는 동화에서 주인공 도로시는 오즈의 마법사가 가진 위대한 능력이 자신을 그리운 고향 캔사스 집에 데려다 줄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험난한 모험을 감행하여 오즈의 마법사가 있는 성에 다다른다. 그러나 오즈의 마법사는 연약한 늙은이이며, 그의 모든 능력은 마법이 아니라는 사실에 도로시는 크게 실망한다. 하지만 오즈의 착한 마녀는 도로시에게 스스로 집에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도로시 자신 안에 언제나 있었음을 알려주게 된다. 결국,“내 집같이 좋은 곳은 없어(There’s no place like home.)”라고 스스로 주문을 외운 덕에 도로시는 그리운 집과 가족들에게 무사히 귀환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오즈의 백성들과 도로시가 거짓말쟁이 사기꾼 오즈의 마법사가 펼쳐내던 재주를 위대한 마법이라 생각했던 것은 그들만이 유난히 어리석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누구에게든 기술과 마술을 구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상과학 영화의 효시로 불리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쓴 영국의 유명한 공상과학소설 작가 아서 C. 클라크는 “극도로 앞서가는 기술은 마술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라 했다. 생각해보면 오늘날의 인터넷, 고속열차, 드론, 스마트폰, 일기예보, 영상통화 등 지금은 우리 일상적인 삶의 일부가 된 기술들을 100년 전 사람들이 보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기술들을 마술이라 생각할지는 너무나 자명하다.

사실 많은 혁신적인 기술들은 처음엔 마치 ‘오즈의 마법사’가 보여주는 것과 같은 초자연적 ‘마술’의 모습으로 등장하여, 우리를 매혹시키며 우리의 생사화복을 쥐고 있는듯 우리 위에 군림한다. 그러다가 점차 많은 사람들에게 그 원리가 폭로, 혹은 이해되어 모두가 알만한 모습이 되면서 그 기술의 자리가 점차 낮아지다가 결국엔 모든 이들의 손에 들어가 그들 삶의 일부가 된다. 기술의 혁신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런 과정을 기술의 민주화라 부른다.

대형 발전소를 건설하고 대규모 송전 시설을 갖추어야만 개개인이 전기를 사용할 수 있었기에 발전과 송전은 국가가 나서야만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의 규모까지는 소규모 수력, 풍력 혹은 태양광 발전기를 이용하여 개개인이 어렵지 않게 전기를 만들어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전기의 민주화’라고도 불리운다. 또한, 은행 같은 금융 기관이 있어야만 가능했던 금융서비스가 이젠 크라우드펀딩과 P2P 기반의 예금, 대출 및 송금 등을 통해 가능하게된 것을 ‘금융의 민주화’라 부르기도 한다.

이런 민주화의 추세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형건물을 짓고 다수의 점원을 고용하지 않아도 알리바바와 같은 세계 최대의 쇼핑몰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큰 규모의 숙박시설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에어비엔비와 같은 세계 최대 규모의 숙박업을 만들어 모든 개개인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집 한 칸을 이용하여 숙박업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또한, 산간 벽지에 사는 농부가 인터넷을 통해 중간 유통업자 모두를 넘어 도시의 수요자와 직거래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국가와 조폐공사와 같은 엄청난 기반이 있어야만 가능했던 화폐 발행이 이젠 컴퓨터를 소유한 개개인들이 모여 간단한 문자나,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하여 화폐를 발행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피아 만시니라는 여성 운동가는 인터넷 정당을 만들어 아무런 정치 자금을 쓰지 않고도 전국 유권자 4%의 지지를 받아내었다. 이렇듯 개개인의 손에 들어가 개개인의 역량이 된 현대 기술은 개개인 모두를 생산과 유통, 화폐 금융 등의 경제적 분야는 물론 언론과 정치에 이르는 모든 삶의 영역에서 집중된 힘과 주도권을 대중의 손에 나누어 주는 민주화를 이루어내고 있다.

하지만, 민주화 자체가 우리 앞에 놓인 문제 해결의 종착역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 우리가 늘 배우는 바이다. 꽁꽁 얼어 붙어 암울하기만 했던 우리나라의 과거 정치 상황에서는 오직 민주화의 봄바람만 불어 온다면 모든 정치적 문제는 눈 녹아 내리듯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끊이지 않는 정치적 혼란과 위기의 정치 현실을 보면, 민주화의 봄바람이 불던 그때는 목적지에 도달하던 때가 아니라, 비로소 진정 의미 있는 새로운 여정의 첫 발자국을 내딛고 있었던 때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민주화의 봄이 우리 앞에 열리고 있던 그 시절에 우리는, 우리 손에 잡혀진 역량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역량에 따라 요구되는 책임의 무게도 함께 커진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고 무거운 책임감으로 신중한 발걸음을 내딛어야 했었다. 스파이더맨에서 여러 번 등장했던 대사처럼 “큰 능력에는 큰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With great power, comes with great responsibility)”

정치적 민주화와는 다르지만 현대 과학기술의 민주화도 우리 앞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고 있다. 소수의 전유물이기에 소수만이 구사할 수 있었던, 마술사의 마술과 같은 과학기술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뻗기만 하면 잡히는 가까운 곳에 놓여 개개인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개인의 역량이되었다. 하지만, 우리 손에 잡혀진 현대 과학기술은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만큼 혼란과 자멸의 가능성을 함께 열어 줄 수도 있기에, 기술민주화가 제공하는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발걸음은 가볍고 경박스럽지 않은 무겁고 신중한 걸음이 되어야 한다.

100년전을 살았던 사람들의 눈에, 오늘날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모두, 신령한 능력을 가진 위대한 마술사와 같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손에 들린 것은 현대 기술이 만들어 낸 신통한 ‘재주’들일 뿐이다. 이런 ‘재주’들로 강화된 우리 개개인의 역량이 열어내는 민주화된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유무선 통신 기술로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어 온갖 지식과 정보를 널리 나누어 서로 배우고 가르치게 될 우리는 새로운 친구를 갖게 되고,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며, 새롭고 혁신적인 경제를 건설하고, 효율적인 정치적 의사 결정 구조를 창출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 새로운 모습의 국가를 형성할 수도 있게 될지 모른다.

요컨대 민주화된 현대 과학기술은 개개인의 역량을 강화시켜 우리의 보폭을 더욱 넓게 해줄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보다 빨리 그리고 멀리 달릴 수 있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가능성에 도취되어 그저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런저런 일을 감행하는 경박스러움은 경계해야 한다. 민주화된 현대과학기술이 열어주는 가능성의 크기가 크고 놀라운 만큼, 우리는 “이 모든 역량을 이용하여 어떤 내일로 향해 나갈 것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고 답하려 노력하며, 신중하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내일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에 어찌 쉬운 답이 있겠는가? 그저 도로시의 소망처럼 오랫동안 잃어 버리고 잊고 있었던 것들을 그리워하는 마음, “내 집같은 곳은 없어(There is no place like home.)”라는 주문이 어쩌면 그 소중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 뿐이다.

/장수영 포스텍 교수(산업경영공학)

장수영 연세대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미시간대학교 산업공학 박사를 마친 뒤 귀국, 포스텍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나눔과기술 공동대표, 크리스천과학기술인포럼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