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텔란作 ‘히틀러’

1억5천만 원은 꽤나 큰돈이다. 바나나는 꽤나 맛있는 과일이다. 그런데 아무리 맛있다 손 치더라도 바나나 한 개의 가격이 1억 5천만 원은 기가 막힐 정도로 비싸다. 인플레이션이 극심해 빵 한 조각을 사기 위해 리어커 가득 돈을 싣고 가야하는 어느 나라의 웃픈 이야기도 아니고 꾸며낸 허구는 더더욱 아니다.

며칠 전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열린 ‘아트 바젤 마이애미’에서 세계적인 갤러리 페로탱(Perrotin)은 덕트 테이프로 벽에 고정된 바나나 하나를 12만 달러에 판매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바나나는 그냥 바나나가 아니라 이탈리아 출신의 미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의 설치작품이다. 그런데 그 바나나를 행위 예술가 데이비드 다투나가 먹어 치워버린 것이다.

이유가 가관이다. 배가 고파 먹었다는 것이다. 바나나가 1억이 넘는다는 것도 코미디이고, 그것이 고가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먹어 버린 것도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카텔란의 바나나에는 ‘코미디언’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행위예술가가 바나나를 먹은 행위는 ‘헝그리 아티스트 퍼포먼스’로 둔갑했다.

미술가나 갤러리 혹은 작품을 구매한 소장자는 1억 5천만 원을 삼켜버린 배고픈 행위 예술가를 고발은커녕 비판하지도 않았다. 이들이 서로 짜고 이 같은 해프닝을 벌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카텔란이라는 미술가는 원래부터 괴짜로 정평이 나 있다. 작가나 갤러리 입장에서도 어차피 바나나는 썩어 버려질 것이니 누가 그것을 조금 일찍 먹어 버렸다고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한다. 카텔란의 바나나는 뒤샹의 유명한 남성용 변기 작품 ‘샘’(1917년)처럼 예술적 본질을 전달하기 위한 매개체 혹은 도구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고액으로 작품을 산 구매자는 한 순간 돈을 날린 것인가? 그렇지 않다.

개념미술에서는 이른바 ‘진품증서’가 중요하다. 전통미술과 달리 증서의 소유가 작품의 소유를 의미한다. 개념미술은 말 그대로 개념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작품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매개적 역할을 하는 물질은 큰 의미가 없다. 따라서 배고픈 행위 예술가가 바나나를 먹었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가 먹은 것은 작품이 아니라 그냥 바나나일 뿐이고, 그 바나나를 먹어 치웠다고 작품의 본질이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꼭 말장난 같다.

카텔란은 규칙과 규범을 깨트리는 ‘말썽꾼’으로 유명하다. 1992년 밀라노에서 개최된 그룹전에 출품할 작품이 떠오르지 않자 경찰서에 작품이 도난됐다고 신고를 하고 접수증을 액자에 넣어 전시했다. 무릎 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히틀러나 운석에 맞아 쓰러진 교황의 모습 등 카텔란의 작품들은 기꺼이 상식에서 벗어난 내용을 묘사한다.

2016년에는 103㎏의 진짜 황금으로 만든 변기를 만들었다. 몸통부터 손잡이까지 모두 황금이다. 사용된 금값만 47억원, 작품가는 70억 원이 넘는다. 올해 황금변기는 전시를 위해 전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의 생가 블레넘궁에 설치됐고, 관람객들은 3분 동안 황금변기에서 볼일을 볼 수 있도록 허락됐다. 부에 대한 탐닉과 집착을 표현한 황금변기에는 ‘아메리카’라는 제목이 붙었다. 그런데 어느 주말 새벽 누군가 저택에 침입해 황금변기를 떼어내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작가의 화려한 전력 때문에 작품이 정말 도난당한 것인지 의심되지만 아직 황금 변기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하다.

권력과 권위, 관습 따위를 서슴없이 하찮은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카텔란은 스스로를 “태생부터 멍청하다”고 소개한다. 멍청한 존재로 위장해 권위와 권력을 엎어버리면 폭소를 유발한다. 지극히 카텔란 다운 수사학이다. 그의 작품들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언어로 관람객들에게 유쾌하게 말을 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또 다시 관객들을 바보로 만들어 버릴지 은근히 기다려진다.

/김석모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