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섭 변호사
박준섭 변호사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후 시상대 위에서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 숙여 자신의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부끄러워했던 손기정에게는 평생에 잊을 수 없었던 스승이 있었다.

그 스승은 양정보통고등학교의 교사 김교신이었다. 손기정은 그를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도, 아니 선생님이 계시다는 생각만 하고 있어도 무엇이 저절로 배워지는 것같은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손기정은 일본에서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김교신에게 자동차로 앞서 달려 달라고 요청했다. 김교신은 자동차로 앞서 달리며 응원했고 올림픽 대표가 되었다. 손기정은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도 가슴에 붙인 일장기를 부끄러워 금메달을 따고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가 김교신으로 부터 불굴의 의지와 민족정신을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김교신은 손기정 이외에도 무궁화 박사 류달영, 아동문학가, 윤석중, 여류시인 석진영, 교육학자 김기석과 정태시 등 쟁쟁한 인물의 스승이었다.

김교신은 두 개의 J를 사랑했던 그의 스승 우치무라 간조처럼, 두 개의 J, 조선과 예수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의 인격이 다른 인격과 하나가 되는 자세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렇게 그는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를 발견하고 민족을 발견하고, 절대자를 발견해서 참 사람, 참조선인이 되도록 인도한 참 스승이었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냉수로 목욕을 하고 기도를 한 후 하루를 시작했고 학생들에게 양칼이라고 불릴 만큼 엄격한 생활을 했다. 그는 일제치하에서 교사를 하면서도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했고 그것을 이유로 학교를 옮기야 하기도 했다. 그는 덴마크 농업운동에 관심이 있었고 생명운동을 하였다. 그의 영향을 받은 이찬갑의 풀무학교와 풀무원은 사실상 우리라에서 최초로 유기농법을 도입한 것이다.
 
또 김교신은 함석헌 등과 성서조선 잡지를 시작했지만 얼마가 지난 후에는 혼자 발행인과 집필자가 되어 성서조선을 발행하였고 이것은 나중에 책으로 6권에 이르렀다. 성서조선의 권두언인 ‘조와(弔蛙)’라는 글이 빌미가 되어 성서조선사건이 터졌고 성서조선을 폐간되고 그는 수감생활을 하였다.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한 해를 복역한 김교신은 출옥 후에 더이상 교사생활과 성서조선발간이 불가능해지자 고향 근처인 함경도 흥남에 있는 흥남 진소비료 공장(일본 해군 군수공장)에 취업했다. 그 곳에서 흥남질소공장에서 노동자들과 생활하며 민족교육을 하던 그는 마을에 악성발진티푸스가 발생하자 간호를 하다가 자신이 전염되 45세의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는다. 조선이 독립되기 한 해전의 일이다.
 
이처럼 김교신은 중등학교 평교사로 작은 잡지를 발행하며 만 44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는 선비였고, 학자·신학자였고, 애국지사였다. 필자는 그로부터 ‘평범한 삶속에서 위대한 삶을 사는 시민’의 인격상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위대한 범인(凡人)’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