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김정은은 소위 그들의 혁명 성지 백두산을 자주 찾는다. 눈 길 속에서 그는 리설주와 나란히 선두에 서고 최룡해와 박정천 등 군 수뇌부가 말을 타고 그 뒤를 따른다. 김정은은 중대 결심을 앞두고는 백두산을 찾는단다. 나름대로 조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정신’을 되새겨 보겠다는 뜻이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북한은 미국에 ‘새로운 셈법’을 요구했으나 트럼프는 아직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트럼프는 김정은을 향해 ‘로켓맨’이라 비하하면서 필요시 군사력 사용까지 언급하고 있다. 다급해진 김정은이 백두산을 찾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몇 해 전 나는 백두산 서파로 등정을 한 적이 있다. 한국 관광객들이 자주 이용하는 북파가 아닌 서파를 통해 백두산 천지에 손을 담갔다. 백두산 서파는 계단 1천442개를 거쳐 5호경계비에 이른다. 이 국경 경계비에는 앞뒷면에 조선과 중국이라는 국호가 새겨져 있다. 북한 땅을 30m까지 밟을 수 있는 곳이다. 사드 문제로 한중관계가 원활치 못하지만 중국 당국은 관광 수입을 위해 이곳 관광은 허용하고 있다. 서파를 오르면서도 길 왼쪽의 북한 백두산을 바라보면서 여러 상념이 들었다. 우리도 중국 땅을 밟지 않는 백두산 관광은 언제쯤 이루어질까.

얼마 전 독일에서 만난 이사벨라는 동독 훔볼트대학 조선어과 출신이다. 그녀는 김일성대학에 유학하여 한국어에 능숙했다. 북한 유학 시절의 기억에 남는 것을 물었더니 백두산 혁명전적지 답사 행군이라고 대답했다. 무거운 배낭은 군 출신 학우들이 대신 메어주었단다. 이처럼 김정은이 백마를 타고 찾아간 백두산은 북한당국이 오래전부터 성역화시킨 지역이다. 북한 지폐 2천원에는 김정일이 태어났다는 백두산 밀영이 새겨져 있고, 그 뒷 봉우리가 정일봉이다. 김일성이 항일 투쟁의지를 새겼다는 3천여 그루의 ‘구호나무’(?)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 이처럼 백두산은 김일성의 백두혈통의 상징물이 되어 버렸다.

김정은의 잦은 백두산 등정은 그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보강하기 위함이다. 김정은 세습정권은 대내적 안정을 위해 집권 초기부터 김일성의 상징을 조작하였다. 그는 조부 김일성의 헤어스타일, 복장, 중절모, 걸음걸이, 연설 행태까지 그대로 모방하였다. 그의 3대 세습에는 적대 세력을 과감히 제거하고 인민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카리스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혁명 위업의 계승자’ 자격을 여전히 백두혈통에서 찾고 있다. 그는 조선노동당 7기 5차 전원회의를 앞두고 대내적 결속과 미국의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 백두산 등정길을 선택하였다.

김정은은 2017년 말 당 중앙위 전원 회의에서 ‘핵, 경제 병진노선’을 포기를 선언하였다. 그는 2018년 4월 7기 3차 전원 회의에서 ‘경제 건설 총력 집중 노선’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자립 경제는 획기적인 개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김정은의 이러한 시대에 뒤진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경제 발전 노선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땅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그의 전통적 리더십은 오래 갈 수 없다. 김정은의 리더십이 합리적 리더십으로 바뀔 때 대남, 대미 수교도 경제 발전 정책도 빛을 발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