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드 모델 T. 당시엔 ‘핵인싸’들만 소유했던 대세 자동차.

△최초의 자동차 아니, 최초의 자동차 사고

1769년, 오스트리아의 육군 공병 니콜라 퀴뇨는 들뜬 마음이 무척 들떠 있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이상한 탈 것을 몰고 나왔다.

그가 타고 있는 것은 앞에는 한 개, 뒤에는 두 개의 바퀴가 달려 있는 세발차다. 그렇다. 이것은 증기기관 자동차다. 이 최초의 자동차는 그 무게가 무려 5t에 이르렀고, 속도는 무게만큼이나 느려서 시간당 3.2km를 달렸다. 이 정도면 보통의 성인보다 느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퀴뇨는 이 거대하고 육중한 증기기관 자동차를 끌고 나왔다. 육군 대신에게 이 경이로운 작품을 보여준 후 무거운 대포를 운반하는 모습을 보여줄 작정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명민한 육군대신이 당박에 퀴뇨가 만든 자동차의 용도를 알아보고 막대한 사례금을 줄 것이라는 건 퀴뇨 생각이었다.

퀴뇨는 그런 기대를 품고 몸소 파리교외의 방생숲까지 시범운전을 나갔다. 그러고 보면 이것이 최초의 드라이브인 셈이다. 거기까진 좋았다. 받은 돈을 어디에 쓸 것인지를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날이 너무 좋아 깜빡 졸았던 것일까?

퀴뇨는 이 중요한 순간, 남의 집 담벼락을 들이받는 사고를 내고 만다. 그리하여 퀴뇨는 최초의 증기기관 자동차 발명자이자 동시에 최초의 자동차 사고를 낸 운전자라는 오명을 가져야 했다.

퀴뇨 덕분에 자동차는 태동부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야 했다. 그는 또 다른 후원자를 찾기 위해 이것을 타고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다 두 번이나 체포되고, 1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종국에는 추방당해 객사했다.

△19세기, 자동차의 전성시대

자동차는 퀴뇨의 삶만큼이나 우울했다. 17∼18세기를 주름잡은 것은 증기기관차였다. 증기기관차는 유럽 전역에 철도문명시대를 열었다. 기차는 더 빨리 달리게 되었고, 더 멀리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 기차는 사람만 운반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 하는 문화까지 운반했다. 유럽의 산업문명은 기차와 함께 더 빨리, 더 멀리까지 퍼져 나가 아시아의 동쪽 끝인 우리나라에까지 와 닿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가 되면서 판세는 역전되었다. 유럽에는 증기기관 차량이 버스로 쓰일 정도로 많이 보급되었으며, 미국에서는 20세기 초까지도 생산됐다. 100년 가까운 동안 성능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1906년 플로리다에서 개최된 ‘스피드위크’ 경기(현재 ‘데이토나 500’)에서 시속 203km라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증기기관 자동차는 강력했다. 하지만 물을 끓여서 달려야 하므로 물도 실어야 했고, 물을 끓일 수 있는 연료인 석탄도 실어야 했고, 증기를 배출하는 장치까지 만들어야 했다. 이 모든 것을 갖추려다 보니 자동차는 무겁고 커야만 했다. 이러한 문제는 가솔린이나 디젤 연료를 사용하는 내연기관에 의해 극복된다.

가솔린 엔진은 1864년 니콜라우스 오토(Nikolaus August Otto, 1832∼1891)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이를 실용화한 것은 현대 자동차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칼 벤츠(Karl Friedrich Benz, 1844∼1929)와 고틀립 다임러(Gottlieb Daimler, 1834∼1900)에 의해서였다. 1885년에 고틀립 다임러는 가솔린 엔진을 자전거에 부착하여 최초의 오토바이를 만들었으며, 1886년 벤츠는 내연기관 자동차를 만들어 이를 특허 등록했다. 두 사람이 다임러-벤츠Daimler-Benz 자동차회사를 창업하면서 본격적인 내연기관 자동차 시대가 열리게 된다.

1889년 독일의 스퍼거는 자전거의 핸들처럼 생긴 조향장치를 원형으로 바꾸었고, 스포츠카의 대명사가 된 포르쉐의 창업자 페르디난드 포르쉐는 1899년에 전기와 가솔린 엔진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만들기도 했다. 1898년 윈톤 자동차 운송회사는 최초로 자동차를 광고했는데, 자동차 가격이 1천달러에 달했다. 당시 미국에서 50달러 정도면 집과 토지까지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하니, 가히 파격적인 가격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짧은 시간 동안에 자동차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일반 대중에게 자동차는 먼 곳에 있었다. 그랬던 자동차는 헨리 포드에 의해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1910년경 포드는 신시네티의 도축장에서 컨베이어벨트시스템의 일괄작업에 영감을 얻어, 이를 자동차조립공정에 도입하였다. 장인 몇 명이 자동차를 만들던 기존의 생산 방식을 과감히 바꾸었다. 모든 부품을 표준화했고, 컨베이어벨트를 이용하여 전문분업화함으로써 대량생산시대를 열었다.

당시 차량 한 대당 생산비가 2천달러 가량 들던 것을 250달러인 거의 1/10의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다른 회사보다 싼 값에 자동차를 공급했고, 이렇게 되자 시장점유율을 8%에서 50%까지 끌어올릴 수 있게 되었다.

한때 포드사의 자동차는 세계의 모든 길을 달렸다. 포드 자동차는 동방의 먼나라 대한제국에까지 들어와 고종임금이 타는 어차로 쓰기도 했다. ‘마이 카(My Car)’시대의 여명은 그렇게 밝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