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6·25 전쟁은 민족적 비극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남침한 북한 공산군은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해 버렸다. 당시 우리 국군은 무엇을 했을까. 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있다. 그러나 분단의 상흔은 아직도 남아 있다. 천만 이산가족 당사자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고 2세, 3세들은 가족 상봉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지난주 실향민과 탈북민이 함께하는 부산 거제 탐방여행에 동참하였다. 부산의 임시 정부청사, 유엔군 묘지,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둘러보는 이틀 일정이었다.

부산 임시 정부청사부터 찾았다. 이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부산 부민동 2만8710㎡의 임시 정부청사, 붉은 벽돌식 2층 건물은 아직 잘 보존되어 있었다. 1923년 설립되어 일제 시부터 경남도청으로 사용했던 이 건물은 6·25 전쟁 시 임시 정부청사로 이용되었다. 이 건물에서 비상 국무회의가 개최되고, 대통령의 긴급 전시의 행정이 집행되었다. 당시의 도지사 관사는 오늘날 임시수도 기념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부산 임시 정부도 전황이 나쁘면 제주도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니 아찔한 생각이 든다. 아픈 역사의 상처를 잊어버린 듯 이곳을 찾는 사람은 적었다.

오후에는 새롭게 단장하여 6·25 참전 전사자 2천300기를 모시는 대연동의 유엔 기념공원을 찾았다. 공원 내에는 전쟁 시 희생된 4만869명의 희생자들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진 위령벽도 있었다. 공원 내에는 16개 참전국과 의료 지원국 5개국 등 22개국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1955년 유엔 총회는 이곳을 세계 유일의 유엔군 공원으로 확정하였다. 우리 일행은 이역만리에서 파병되었다가 전쟁에서 산화한 이들에게 정중한 묵념을 올렸다.

우리는 마지막 일정으로 거제 포로수용소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북한 인민군 포로 15만, 중국군 포로 2만 명, 최대 17만3천여 명의 포로가 수용되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여기에 여성 포로 300여 명도 포함되어 있음에 놀랐다. 현장에 재현된 형편없는 수용소 막사는 당시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이곳에서는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간의 유혈 살상도 있었다. 1952년 5월 7일에는 수용소 관리관 돗드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는 사건도 있었다. 반공 포로가 석방되고 휴전 협정이 체결되어 이 수용소는 폐지되었다.

이번 탐방은 우리 모두 전쟁 아픈 상처를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번 방문객들은 대부분 6·25의 비극을 체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들이다. 최근 북한을 탈출하여 새롭게 출발한 이들은 신기한 눈으로 비극의 현장을 바라보았다. 북에서 그들이 배운 6.25를 미화한 ‘민족해방’ 전쟁의 부당성만은 충분히 목도했을 것이다. 전쟁 시 남한으로 피난해온 실향민들은 전쟁의 참화를 체험하고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전쟁의 상흔을 바라보는 그들 간 시각에는 다소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의 비극이 이 땅에서 재현될 수 없다는 교훈은 모두가 깨닫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