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동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배한동 경북대 명예교수·정치학

1945년 8·15 해방 정국은 어수선했다. 얄타 협정에 의해 38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 남북을 갈라 진주하였다. 해방 후 당시 국내 정국은 신탁과 반탁, 단정과 통일 정부 수립으로 양분됐다. 중경 임정의 주석 김구 선생은 임정 대표 자격을 상실한 채 그해 11월 겨우 미군 비행기로 귀국했다. 귀국 후 김구 선생은 좌우합작운동을 벌이면서 중도파를 규합한 김규식과 뜻을 같이 했다. 해방 정국 초기 김구는 이승만과 호형호제하면서 우호적이었으나 결국 정부 수립 문제로 상호 불신과 갈등을 겪게 된다.

이승만의 단정을 반대하던 김구는 북측에 남북 지도자 회담을 제의한다. 1948년 3월 25일 북에서 응답이 왔다. 김일성과 김두봉이 “통일적 자주독립을 위한 전조선 대표자 연석회의를 갖자”는 것이다.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통합 정부 수립이라는 일념에서 반대를 무릅쓰고 북행을 강행한다. 출발 당일까지 경교장 담 밖의 수많은 청년들의 반대 시위가 있었다. 그는 김규식과 비서 선우진, 아들 김신만 데리고 평양에 도착한다. 백범일지는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고 기록하고 있다.

4월 21일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김일성이 ‘북조선 정세보고’를, 백남운과 박헌영이 ‘남조선 정세보고’를 했다. 4월22일 남한 41개 단체, 북한 15개 단체의 695명이 연석회의장을 가득 채웠다. 박헌영, 백남운, 김구, 김규식, 조소앙, 김일성, 김두봉 등 좌우익 명망가들이 한 자리에 앉았다. 23일 남북 대표자들은 남과 북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투쟁을 벌일 것을 약속했고, 미국과 소련의 양국군이 동시에 한반도에서 철군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연석회의는 정부 수립에 관한 완전한 합의는 이루지 못했다. 분위기는 벌써 ‘김일성 만세’ 소리에 술을 따라주고 주악이 울려 퍼지는 이상한 분위기가 연출됐다고 한다.

4월 30일 4김 회담은 김두봉 집에서 김구, 김규식, 김일성이 참석해 성사됐다. 이 회의에서 남한에 대한 전기송출 문제와 연백댐의 개방에는 합의했다. 김구는 그 회담에서 조만식 선생을 남쪽으로 대동하겠다고 요구했으나 김일성은 여러 핑계를 대며 묵살했다. 김일성은 회담이 결렬되자마자 전기와 농업용수를 끊어버렸다. 김구는 5월 30일 힘없이 서울로 돌아왔고 평양 연석 회담에 실망한 그는 김일성의 2차 회담 제의마저 거부했다.

1948년 남한에서 5·10 선거가 치러지고, 북은 6월 29일 ‘인민공화국’ 수립을 결정한다. 이듬해 1949년 6월 29일 김구 선생은 73세로 암살이라는 비운을 맞는다. 김구 선생은 민족 통일이라는 원대한 꿈을 펼치지 못하고 세상을 하직한 것이다. 그는 생전 남북한 단정 수립은 결국 군사적 대결과 민족의 영구 분단으로 이어진다고 개탄했다. 1950년 6·25 전쟁을 정확히 예측한 것이다. 그는 조국과 민족을 위한 헌신성은 탁월하지만 정치적 현실 감각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받는다. 그러나 그의 항일 우국충정은 어느 누구도 추종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