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자가 간다, 영주로 간다

영주 부석사의 가을 풍경.
영주 부석사의 가을 풍경.

균형과 절제·조화와 우아함을 갖춘 부석사

유서 깊은 절을 찾아가는 길. 가로수로 서있는 은행나무에서 눈이 부신 황금빛 잎사귀가 무더기로 떨어지며 함박눈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어린 시절 읽던 동화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 가운데 웅장하게 들어선 부석사. 초입에서부터 경내까지 나무란 나무는 모두 가을 옷을 갈아입고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그 노랗고 붉은 형상이 여행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일주문으로 들어서자 오면서 본 ‘은행나무의 화려한 페스티벌’이 한 번 더 펼쳐졌다. 이어서 관광객들에게 눈 호강을 시켜주는 천왕문과 안양루가 나타났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무량수전. 정면 5칸·측면 3칸의 무량수전은 팔작지붕이 미려하기로 이름 높은 국보(제18호)다. 부석사의 본전인 무량수전은 건축을 전공한 학자들로부터 “한국에서 가장 멋들어진 목조 건물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60여 년 전에 국보로 지정된 이 건축물은 배흘림기둥(조화와 안정을 위해 기둥 중간 부분의 배가 약간 볼록하도록 꾸민 양식), 귀솟음(건물의 귀기둥을 가운데 기둥보다 높게 꾸미는 기술), 안허리곡(건물 가운데보다 귀퉁이 처마 끝을 더 튀어나오도록 만든 것) 등의 공법으로도 주목받는다.

나무 문 하나, 기둥 하나에까지 선조들의 숨결이 묻어나는 부석사 건축물들은 균형과 절제, 조화와 우아함을 모두 갖췄다.

꽃 피는 봄과 눈 내린 겨울 풍경이 절경이라는 부석사. 하지만 사람을 설레게 하는 면에선 부석사의 가을 풍광이 최고일 듯했다. 이 사찰엔 국보도 여러 개다.

앞서 말한 무량수전을 필두로 측면을 바라보는 독특한 형태로 제작된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은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부처의 위엄이 잘 표현돼 있다”는 평가를 얻었다.

천년 세월을 뛰어넘어 무량수전 앞에 오연하게 서있는 석등(石燈) 역시 국보다. 3m쯤되는 이 석등은 신라시대 석공의 돌 다루는 기술이 얼마나 세련되고 정교했는지를 알려준다. 볼거리 가득한 절 안을 이리저리 돌아보다 조사당(국보 제19호) 앞에 섰다. 그곳엔 사찰을 만든 의상대사의 형상이 안치돼 있었다. 그걸 본 순간, 기자의 상상력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까마득한 옛날로 날아가 부석사가 만들어질 무렵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가을날이었다. 범종루 근처에서 들려오는 법고(法鼓) 소리가 맑고 선하게 살아오지 못한 지난 삶을 반성하게 했다. 부석사는 ‘착하게 살아가는 방식’을 고민하게 하는 절이다.

 

무섬마을 외나무다리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관광객들.
무섬마을 외나무다리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관광객들.

내성천 아슬아슬 외나무다리 건너 ‘무섬마을’

이른 아침. 보드라운 물안개가 관광객들의 볼을 어루만졌다. 저 멀리 강을 건너기 위해 나무로 만든 다리가 보였다. 산속에선 작은 새가 청명한 소리로 울고 있고…. 도시에선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 포근한 둥지처럼 자리 잡은 무섬마을. 이곳엔 사당과 우물이 없다.

옛날 풍수학자들은 “마을이 가라앉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내놓았고, 이를 믿은 사람들이 우물을 만들지 않아서다. 사당 역시 홍수가 날 경우 조상들의 위패가 떠내려 갈 것을 우려해 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또 하나 무섬마을이 특이한 것은 농사짓는 땅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엔 농부들이 배를 타고 건너편 탄현리까지 가서 모내기와 벼 베기를 하곤 했다. 아슬아슬한 외나무다리가 생기고부터 배는 사라졌다.

‘무섬’이란 단어는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의미한다. 수도리(水島里)의 우리말인 것. 그 이름처럼 무섬마을은 물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다. 휘돌아 앞을 흐르는 내성천은 서정적인 풍경을 이 마을에 선물했다. 그런 이유로 일 년 내내 관광객이 적지 않다.

하지만 마냥 좋았던 시절만 있던 건 아니다. 조선 후기까지 경상도 각 지역 특산품이 모여드는 큰 마을이었지만, 장마 때면 불어난 물에 의해 다리가 떠내려가고 마을은 어김없이 수해를 입었다. 무섬마을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전통을 이어온 귀한 공간이다.

무섬마을을 대표하는 건 목재 외나무다리.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든 이 다리는 폭이 30cm에 길이가 150m에 이른다. 무섬마을을 찾았다면 꼭 한 번 걸어보길 권한다. 현재는 물이 얕아 빠져도 큰 위험은 없을 것 같았다.

‘양반의 고장’답게 무섬마을엔 고택과 문화재도 숱하다. 해우당고택, 만죽재고택, 김규진 가옥, 김위진 가옥 등을 살펴보는 재미를 빼놓을 수 없다.

전통한옥에서 생활하고 잠드는 체험관광도 가능하다. 문의는 054-633-1011(무섬마을 전통한옥 체험수련관).

 

태장리 느티나무.
태장리 느티나무.

600살 대장부 ‘영풍 태장리 느티나무’

자그마치 600살이라고 했다. 속을 텅텅 비워내면서까지 견뎌온 그 아득한 시간이 실감으로 와 닿지 않았다. 기자가 ‘무한’이 아닌 ‘유한’을 살아가는 인간이라서 그랬을 터.

곧게 뻗은 소나무와 초봄에 꽃을 피우는 매화나무가 선비의 지조를 상징한다면, 영주시 순흥면 태장리에 거대한 모습을 드러낸 느티나무는 ‘대장부의 넉넉한 품’이라 부르면 좋을 듯했다.

둘레가 9m에 가깝고 동서와 남북으로 뻗어 내린 가지가 25m에 육박하는 태장리 느티나무는 제 몸 안에 웅장함과 수려함을 두루 가지고 있다.

만약 여름날 초등학생들이 소풍을 온다면 족히 2~3학급 아이들 모두에게 넉넉한 그늘을 나눠줄 수 있겠다 싶었다.

세월의 흐름과 지나온 영주의 역사를 눈앞에서 지켜봤기에 누구보다 현명해 보이는 고목. 하지만, 세상의 현자(賢者)가 그러하듯 나무는 모든 것을 알지만 입을 열어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멋질 수 있는 것 아닐까? 태장리 느티나무는 천연기념물 제274호다. 마을 사람들은 휴식처를 제공하고, 마음의 위안을 선물해온 이 나무를 무엇보다 아낀다고 한다. 해마다 정월 보름이 되면 나무 아래서 동제(洞祭·마을의 공동 제사)를 지내며 안녕과 행운을 빈다.

프랑스의 시인 이지도르 뒤카스(Isidore Ducasse)는 “나무는 자신의 위대함을 모른다”라고 했다. 이 짧은 문장에 담긴 깊숙한 은유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태장리 느티나무와 만나는 것이다.

 

영주시 가흥동에 자리한 삼판서 고택.

조선의 장관 3명이 생활한 ‘삼판서고택’

판서(判書)란 지금으로 말하자면 장관에 해당하는 고위직 벼슬이다. 특정한 어떤 한 집에서 3명이나 되는 판서(장관)가 나왔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드문 일. 가문으로선 영광이고 혈족들에겐 큰 자랑이다. 영주시 가흥동 언덕 위엔 삼판서고택(三判書古宅)이 있다. 여기서 3명의 판서는 고려 말과 조선 초기에 활동한 영주 출신의 정운경, 황유정, 김담을 지칭한다. 이들 모두는 앞서 말한 삼판서고택에서 살았다.

고려 말기에 형부상서(조선시대 형조판서에 해당)를 지낸 정운경은 ‘조선의 일등 개국공신’으로 불리는 삼봉 정도전의 아버지다. 삼봉의 어머니는 순흥 안씨로 알려져 있다.

정운경의 사위인 황유정은 조선이 개국된 초창기 공조, 예조, 형조에서 판서로 일했다. 그 역시 정도전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 했고, 마찬가지로 개국공신이었다.

조선 세조 때 이조판서로 봉직한 김담은 황유정의 외손자. 황유정은 사위에게 집을 물려줬는데 그 사위의 아들이 ‘장관’이 된 것이다. 김담의 어머니는 삼봉의 여동생이다.

삼판서고택을 찾은 날은 볕이 좋았다. 따스한 가을 햇살 아래 고택의 검은 기와가 흑진주처럼 빛났고, 돌아본 집 내부에선 은은한 향기가 났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절정에 섰던 ‘3명 판서’의 기운을 받기 위해서인지 주말이 아님에도 찾는 이들이 많았다. 산책 나온 영주시민도 여러 명이었다. 이 집에선 판서만 나온 게 아니다.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교리, 훈련원 녹사, 단성 현감, 통례원 좌통례 등의 벼슬아치도 태어났고, 천문학 교수 김만인도 여기서 첫울음을 터뜨렸다. 원래의 삼판서고택은 1961년 영주 대홍수 때 상당 부분이 파손됐고 이후 철거됐다. 현재의 고택은 영주 유림들이 뜻을 모아 2008년 복원한 것이다. /홍성식·김세동 기자

    홍성식·김세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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