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축서사 보광전 앞 석등과 장엄한 풍광. 축서사는 봉화군 물야면 월계길 739에 위치해 있다.

문수산 800m 고지에 독수리 한 마리 웅크리고 있다. 독수리가 깃든 축서사(鷲棲寺)는 지혜를 상징하는 4대 문수성지의 하나로 신라 문무왕 13년(서기 673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단체 관광객을 태운 버스가 붉은 마가목 열매 사이로 빠져 나가자 휴일 오후의 사찰은 고요하다. 붉게 타오르는 문수산과 지형을 제대로 살려 배치된 큰 전각들이 위압적이리만치 장엄하다. 높은 계단 위의 보탑성전과 대웅전을 향한 소백의 준령들조차 무릎을 꿇고 낮은 자세로 물결친다.

전각은 대부분 새로 지었다.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오층 석탑은 세월이 가져다 준 애잔한 소박미는 없지만 조각이 섬세하면서도 화려하다. 장대한 풍광에 걸맞은 중창불사는 불심의 정성 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수천 년 뒤 고졸미가 흐르는 축서사를 상상하면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진다.

오래된 전각은 보광전 하나뿐이다. 젊은 대웅전에 자리를 내주고 조용히 옆으로 물러나 앉은 조선 중기 건물, 신라 문무왕 때 만들어진 석조 비로자나불상과 화려한 목조광배(보물 제995호)를 지키며 묵언 중이다.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일본군의 방화로 소멸의 아픔을 안고 흑백 필름처럼 살아가는 꽃이다.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두로 비추는 비로자나불의 수인,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말아 쥔 지권인에 마음이 한참 머문다. 오른손은 부처님의 세계이며 왼손은 중생의 세계를 뜻하며, 부처와 중생, 깨달음과 어리석음은 둘이 아님을 말한다. 고색창연한 중후함은 없지만 천년고찰의 명맥이 단단히 뿌리내린 절이다. 문득 주지 스님이 뵙고 싶다.

총무 스님을 뵙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시자 스님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주지 스님 뵙기를 간청했다. 어떤 마음의 준비도 없이 차방에서 주지 스님을 기다린다. 눈이 부시도록 맑고 정갈한 노스님이 문을 열고 나오신다. 선원장 무여 스님이란 걸 뒤늦게 알았다. 삼배의 예가 채 끝나기도 전에 편하게 앉으라고 손짓하신다.

정적이 흐르고 스님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신다. 무엇을 여쭤봐야 할지 당황스럽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감돈다. 말씀도 움직임도 낮고 조용조용하다. 할 일이 산더미처럼 불어나 노예처럼 끌려 다니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갈증과 갈등으로 지쳐 있던 몸과 영혼에 촉촉한 단비가 내리는가 싶더니 차향 같은 자비로운 기운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눈물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뜨거움으로 변해 걷잡을 수가 없다. 난감하다.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 난생 처음 경험하던 성전암의 새벽 예불 종성 앞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던 그 날의 눈물과 흡사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을 쏟고 있다.

나직나직 스님이 말씀하신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정을 줄이고 꾸준히 수행해 나가야 내면의 참 기쁨을 얻을 수 있노라고.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수행을 하다보면 글에 힘도 생기고 일도 즐거워질 거라며 호흡법으로 하는 백팔배를 가르쳐 주신다. 이미 스스로 알고 있는 답이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정신과 육신은 텅 빈 것처럼 고요하다.

마음 편한 것 만한 행복이 있던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 곧 수행임을 알면서 나는 어떤 간절한 목표도 없이 어설픈 앎만 가지고 주변을 얼쩡거렸다. 초심으로 돌아가 염불과 법문에 좀 더 귀를 기울이고 새로운 각오로 산사를 찾고 글을 써야겠다는 각오가 선다. 삼매에 드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자세로 어떤 길을 가느냐는 참으로 중요하다.

조낭희 수필가
조낭희 수필가

책이 나오면 꼭 보내달라고 말씀하신다. 의욕과 효능감을 주기 위한 말씀이란 걸 모를 리 없다. 부처님 대하듯 공경하는 자세로 따뜻하게 맞고 배웅해 주시던 스님, 내 눈물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선지가 깊고 계행이 청정하신 참된 선지식의 모습이다. 무지함이 불러온 뜻밖의 행운, 그것은 수도 없이 회의가 들던 ‘산사 가는 길’의 연재가 가져다 준 인연이기도 하다.

그동안 고색창연한 전각이나 고즈넉한 사찰의 분위기에 매료되어 절집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얻은 평화는 수명이 짧았다. 허기진 몸과 영혼은 뜬금없이 마찰을 일으켰고, 나는 그런 나를 다독이느라 늘 분주했다. 절을 내려가도 내게 깃든 감동과 향기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시는 길을 잃고 헤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응향각을 빠져나오는데 보광전 앞 석등이 나를 잡는다. 그도 나도 허공처럼 무심한데 발아래 굽이치는 산 물결은 지극히 잔잔하고 따뜻하다. 의무와 무게로 느껴졌던 일들이 은혜롭게 다가온다. 산세가 빼어난 명당터에 자리잡은 축서사, 영겁의 세월을 살아온 독수리의 지혜로운 날갯짓이 들린다.

지혜로 가는 길은, 언제나 나를 향해 뻗어 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개를 편다고 했던가.